내 책꽂이의 가장 높은 곳에는 오래된 31권짜리 철학 전집이 꽂혀 있다.
1978년에 출간된 세계 사상 대전집.
철학자나 주요 주제들을 묶어서 만들어져 있고,
원문의 완역본이 아닌 발췌와 해설로 구성된 교양 철학 전집이다.
2단으로 된 세로 읽기 구조이고,
번역 또한 지금처럼 정확하거나 깔끔하지 못하다.
이 중 몇 권은 오래전에 읽었지만 누구의 철학이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유는 그냥 읽기로 했다.
철학을 새롭게 공부하려는 것도 아니고,
나의 생각을 검증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어떤 목적도 없다.
말 그대로 그냥 읽기로 했다.
내가 살지 않았던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걸 듣고 싶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사실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쪽이 더 먼저였는지도 모른다.
방 안 한 구석에 있던 나의 책상과 의자는 까뮈의 분리 공간이 되었고,
유일했던 나만의 공간은 사라졌다.
지금 내가 온전히 혼자가 되는 시간은
출퇴근 길 운전하는 시간뿐이다.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회복의 시간이다.
공간을 만들 수 없기에
책을 읽으며 사유하는 시간 안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전집에서 책 한 권을 뽑았다. 칸트였다.
의도는 없었다.
순서대로 꽂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 제목을 보고 뽑은 것도 아니었다.
손가락이 먼저 닿았고, 그냥 꺼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묵직했다.
이 책은 불편하다.
세로로 읽어야 하고,
문장은 익숙하지 않고,
의미도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천천히 읽게 된다.
멈추게 되고,
다시 보게 되고,
그 자리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래된 철학 전집을 읽으며
나만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