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리지 못한 현실

현실의 방

by 늘람

모르포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날개의 색은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도가 바뀌는 순간 전혀 다른 색으로 드러난다.

어떤 방향에서는 선명한 파란색이지만,

다른 방향에서는 그 색이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이 변화는 나비의 색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다.

날개 표면의 미세한 구조가

빛의 특정 파장을 반사하고 나머지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파란색은 나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비와 빛과 눈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나비의 색을 묻는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 설정된 것일 수 있다.

색은 대상에 속한 속성이 아니라,

조건들이 만나는 방식에서 잠시 나타나는 결과에 가깝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색을 말한다.

누군가는 분명히 파란색이었다고 기억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 차이는 대상의 변화라기보다

각자가 마주한 조건의 차이에 가깝다.

그러나 그중 하나의 판단이 더 강하게 남는 순간,

다른 가능성들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려난다.


그때 남는 것은 사실이라기보다,

눈에 도달한 파장의 차이에 의해 선택된 결과에 가깝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그 나비의 색이라고 부른다.

조건이 먼저 있었다는 사실은 점차 기억에서 지워진다.


같은 장면도 다르게 기억된다.

같은 말을 들었지만,

어떤 사람은 그 말의 의미를 중심으로 기억하고,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전달되는 방식이나 분위기를 떠올린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 있었던 빛의 색깔이나 공기의 온도를 먼저 기억하기도 한다.


기억은 사건을 저장하지 않는다.

기억은 사건과 접촉한 방식을 저장한다.

시간이 지나면 남는 것은

사건 전체가 아니라 각자가 붙잡은 일부의 형태다.

그리고 그 일부가 반복되면서

사건의 모습은 점점 하나의 방향으로 굳어진다.

굳어진 것은 사실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호출되는 경로다.

그 경로가 충분히 깊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기억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는 중심에 서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본 것들이 쌓여 각자의 현실을 이룬다.

그러나 그 삶들이 겹쳐지는 순간, 일부의 이야기만이 남는다.

더 자주 말해진 것이 남고,

더 큰 목소리로 반복된 것이 형태를 갖춘다.

남지 않은 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불리지 못한 것뿐이다.

불리지 못한 것은 점차 존재하지 않는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별이 흐려지는 것은 그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측되기 이전의 계는 하나의 상태로 결정되어 있지 않다.

여러 가능성이 동시에 겹쳐 있고,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중 하나가 결과로 남는다.

포착되지 않은 값들은 기록되지 않은 채 남고,

기록되지 않은 것은 이후의 어떤 계산에도 참여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른 가능성들이 처음부터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측정 이전에 겹쳐 있던 상태들은

측정 이후에 갑자기 소멸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 영역으로 밀려난 것에 가깝다.


우리는 하나의 결과를 얻고, 나머지를 닫는다.

닫힌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열린 하나만을 가지고 다음으로 나아간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르게 설명되는 이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설명은 반복되며 강화되고,

어떤 설명은 점차 사라진다.

어느 순간 반복은 설명이 아니라 사실처럼 들리기 시작한다.

남은 설명이 사건의 형태를 결정하는 순간,

그 사건은 하나의 모습으로 정리된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것들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점점 더 흐려진다.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 구조가 단단해질수록,

처음에 그것이 구성된 것이었다는 사실은 더 깊이 묻힌다.


우리는 남겨진 것들을 중심으로 장면을 구성하고,

그 장면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현실은 주어진 전체가 아니라,

남겨진 결과들의 집합으로서 구성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언제나

어떤 것을 포함하는 동시에 어떤 것을 밀어낸다.


모르포 나비가 다시 날아간다.

이쪽에서 보면 파란색이고, 저쪽에서 보면 색이 없다.

나비는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자신이 본 색을 현실이라고 부른다.

그 색이 조건 속에서 발생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비는 알고 있을 리 없고, 우리도 대부분 잊는다.


그렇지만,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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