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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May 20. 2018

"꿈은 없어요"

목포시 만호동에서 만난 고등학생들 이야기

“가장 좋았던 일은... 아직 까진 없는 거 같아요.
햄이랑 소세지가 죽어서 슬펐어요.”

  유달산 노적봉에서 내려와 목포항을 향해 걸었다. 만호동의 한산한 골목에는 젓갈이나 건어물을 파는 가게와 오래된 여인숙과 작은 다방이 많았다. ‘비금젓집’, ;여수여인숙’, ‘정다운다방’의 간판에 세월이 묻어 있었다. 골목 한쪽에 교복을 입은 학생 여덟아홉 명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톡톡 튀는 목포 사투리와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퍼졌다. 무슨 재미난 놀이와 이야기를 하며 노는 건지 궁금해져 다가갔다. 

  소녀들은 자신의 키보다 높이 굳게 잠겨 있는 녹슨 철문을 훌쩍 뛰어넘어 빈 건물에 들어가려는 참이었다. 며칠 전 다리를 다쳐 철문을 넘기 힘든 은주만 혼자 건물 밖에 남아서 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길고 얼굴이 하얘서, 귀신의 집 문 앞에서 귀신과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 잠시 들었다.  

전라남도 목포시 고등학생 홍은주 유혜인 김유진 박미소 오한솔


  언덕이 높아서 등굣길이 힘들다는 목포여자상업고등학교의 1학년생 친구들은 방과 후, 학원 수업 시작 전까지 시간이 남아 다 함께 시내버스를 타고 이곳, 오래전 문을 닫은 뒤 방치되어 있는 “녹십자 폐병원”에 놀러 왔다. 병원에 살고 있다는 환자 귀신의 소문을 전해 듣고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러니까 대낮의 담력 시험 놀이였다. 군데군데 깨진 유리창 사이사이에서 아이들과 귀신들의(?) 놀란 비명소리와 도망가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왁자지껄하게 섞여 터져 나왔다.              


  “저는요, 북교초등학교를 나오고 목여중을 나왔어요. 옷을 좋아해요. 입는 것도 좋아하고, 보는 것도 좋아하고. 옷을 직접 만들어서 입고 싶어서 대학을 의류디자인학과로 갈 거예요. 학교에서는... 밥 먹을 때가 제일 재밌구요, 친구들이랑 밖에서 사 먹을 때는 주로 인스턴트 음식 먹어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물어보자 일 초만에 날아오는 해맑은 답변. 

  “항상 최선을 다해서 살 거예요!” 

  짧은 말들이였지만 목소리와 표정에서 젊음의 활기가 느껴진다.  

  “은주야! 우리 잘 보여? 핸드폰으로 우리 인증샷(사진) 좀 찍어 줄래?!” 

  층층마다 귀신을 찾아보고 한참 후에 옥상까지 도착한 소녀들이 은주를 불렀다. ‘목포녹십자병원 야간진료’ 간판 위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며 ‘인증샷’을 찍은 후, 탐험을 마친 친구들은 건물을 내려와 다시 철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귀신을 본 아이들은 흥분한 채 “봤냐? 귀신이 한두 명이 아니야!”, “숨바꼭질해, 미친년(귀신)이...”라며 귀신의 숫자와 행동까지를 증언했고, 귀신을 못 본 아이들은 “에이, 귀신은 없고 모기만 잡았네.”, “하나도 재미없어야.”, “밤에 다시 오자.” 고 실망감을 표했다.

  “세무과, 1반, 9번” 유진이는 노래를 좋아한다. 옆에서 미소가 “노래 잘해요?”하고 묻자 “부를 만큼 불러요!” 라고 자신 있게 응수한다.  

  매일매일 걸어서 오르는 목포여상 오르막길 때문에 학교 다니기가 싫다는 혜인이는 마음을 말하기를 꺼리는 건지 “꿈은 없어요. 그냥, 생각 없이 살아요.” 라며 쑥스러워하며 웃어넘긴다.

  “가장 좋았던 일은... 아직 까진 없는 거 같아요. 슬펐던 일은, 두 달 전이에요. 두 달 전에 햄이랑 소세지가 죽어서 슬펐어요.” “응? 햄이랑 소세지가 죽었다고?” “햄스터, 햄스터!” 아, 햄과 소세지는 한솔이가 키우던 햄스터들의 이름이었다. “좋아하는 가수는 ‘동방신기’!”

  “박미소예요. 이름 예쁘죠? 하하” 되물으며 웃는 미소의 꿈은 “부자! 부자 되기!” 라고 한다. “돈 많이 벌어서... 결혼도 하고, 안 죽고, 잘 살아야죠.” 한솔이처럼 미소에게도 아직 살면서 “기억날 만큼 좋았던 때는” 없다. “싫은 건 공부하는 거! 아침에 일어나기 너무 싫어요. 열두 시까지 자고 싶어요. 열두 시까지 자고 나서 학교에 가고 싶어요. 솔직히 학생이라고 다 공부해야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공부 안 해요. 그래서 이비예요.” 이비(EB)는 E-비지니스과의 줄임말인데, 학과 중에 “제일 공부 못하는 과”라고 설명해 주었다. “평소에 좋아하는 건?” “먹는 거! 고기~!”


  이토록 복작복작 넘치는 활력의 소녀들이 매일매일 학교와 학원에서 얼마나 조용하게 가만히 앉아있을지 상상하니 답답하다. 우리들 인생에는 수학 공식과 문법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즐거움과 삶의 활력이 보다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담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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