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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최늘샘 Apr 27. 2018

사립문을 열어라

목포 다순구미로에서 만난 할머니

“어째 사람 사는 집들이 대낮에 사립문을 닫아 버리고... 
복 하나도 안 들어가겄네...”

전라남도 목포시 온금동 다순구미로에서 만난 할머님

  목포 달동네 골목을 걷다가 1924년생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고흥 앞바다 섬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광양과 순천을 거쳐 친정오빠를 따라 목포에 온 뒤, 결혼을 하고 다섯 딸과 네 아들을 낳아 키우며 평생을 살았다. 


  초입에는 오래전 문을 닫은 벽돌공장이 있고, 다닥다닥 집들이 언덕으로 이어진 온금동 다순구미 동네 중턱 골목에, 지금은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옛집이 있다. 낮이면 할머니는 목포 앞바다와 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집 앞 평상에 나와 앉는다. 앞바다에는 오색 깃발을 단 어선이 트로트 음악을 크게 울리며 지나가고 있었는데, 배에 탄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온몸을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풍어와 배의 안전을 기원하는 춤이었을까

  “그냥 오는 사램, 가는 사램 쳐다보고 있지, 뭐. 심심한께... 여기 온금동은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동네여, 부자는 하나도 없는 동네여. 동사무소도 유달동으로 가버리고... 저 아래 노인정에 가면 얘기하고 놀 사람들 있지만서도 거기까지 내려가기도 귀찮애. 여기 집 앞 평상에 혼자 앉아 있지 뭐...” 


  여기선 노란 봉고차에서 내리는 “잔잔-한 유치원 아그들”도 보이고, 재보궐 선거 후보의 명함을 돌리느라 골목을 서성이는 여성들도 보인다.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집집마다 사립문 다 딱딱 닫아 버렸구마이. 해가 넘어가면 닫을까, 어디 나갈라믄 닫을까. 어째 사람 사는 집들이 대낮에 이렇게 사립문을 닫아 버리고... 복 하나도 안 들어가겄네...” 

  집집마다 당연히 대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서로 간에 왕래도 잦았던 옛날의 정겨움이,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뭐시 좋아? 아이고... 좋았던 기억이 뭐 있으까, 항상 머슴살이하디끼 살았지. 젊어서는 일해 묵고 살고, 애기들 가르치느라고 머리가 다 하얘질 때까지 늙었고, 이자 늙은께 아픈 데 밖에 없어... 밭에서도 일하고, 배도 타고, 공장에서도 일했지. 혼자 산께 생각은 편해. 자식들이 오라 그래도 가기 싫고... 집이 없으면 가지만 집이 여깄은께 집 지키고 살제.” 

  손주들은 명절에나 오고, 가까이 사는 아들이 종종 반찬이나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사오곤 한다.

  “옛날에는 동네에 거지들이 동냥하러 오면 동냥 주고 그랬지... 하기는 동네 사람 중에 성이 주가(朱家)라고, 자기 며느리보고도 ‘동냥치 오면 밥 한 숟갈도 주지 마라’고 그랬제. 동냥치 오면 바가지 깨 불고. 그러면 동냥치들이 ‘동냥은 안 주나마 바가지나 깨지 마라’고, 그라고 가고... 그런 사람들한테도 그러게 도가게(독하게) 한께 죽어서 구렁이가 됐다게. 그랑께, 사람이 너무 도가게 할 것도 아니야...


  다순구미 마을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추장덕 할머니는 갑자기 내 걱정을 해주셨다. 직장도 소속도 없이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이 여행자가 안돼 보였나 보다. 


  “근데 이러고 대녀서 밥 먹고 살어? 돈 벌어야 묵고 살어! 이라고 다니지 말고 돈 벌어야 묵고 살제... 근데 결혼은 했어? 얼른 돈 벌어가꼬 결혼도 하고 그래! 젊은 세월 얼른 넘어 가부러.” 


  한 마디 한 마디 뒤통수를 치는 사이다 같은 목포의 방언이다. 부모나 친척에게 들었으면 싫었을 말들이 목포에서 만난 할머니에게 들으니 시원하고 감사했다.      


  비가 오지 않는다면, 내일도 할머니는 삐걱대는 사립문을 활짝 열어놓고 평상에 나와, 살아온 많은 시간을 천천히 돌아보고, 살아갈 남은 시간을 저만치 바라보며, 목포의 끝자락 다순구미의 하루해를 보낼 것이다.     



木浦

목포라는 지명은〈고려사(高麗史)>(1451)에 처음 나오는데, 유래는 정확하지 않다. 나무와 목화가 많이 나서 목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육지와 황해가 만나는 길목이라는 뜻으로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더 유력하다. 조선 말기까지도 무안현에 딸린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1897년에 개항된 이래 일제 식민지 거점 도시로 이용되면서 급속히 성장, 오늘과 같은 틀을 이루었다. 1932년에는 인구 6만 명으로, 당시 전국 6대 도시의 하나였다.


* <남한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여행하며,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여 명의 사람들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 인터뷰 프로젝트입니다.  

여행은 강화에서 시작해 천안, 칠갑, 웅천, 서천, 군산, 만경, 정읍, 목포, 장흥, 벌교, 순천, 여수, 산청, 욕지, 창원, 밀양, 군위, 의성, 안동, 봉화, 태백, 정선, 강릉, 양양, 속초, 서울까지 스물일곱 군데 지역으로 이어집니다.  

여행을 하고 글을 담는 필자는 한 명의 삼포세대 청년일 뿐입니다만,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 인터뷰에 응해 준 감사한 사람들의 절절하고 따뜻한 삶의 이야기가 공감되고 전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싸바이디, 나마스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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