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최늘샘 May 20. 2018

"누가 내 밥 먹여 주나"

밀양시 삼문동 축구인 박재수 씨의 이야기 

“내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세상은 천지 차이야...”

  커다랗게 잘 익은 수박을 한창 수확 중인 창원 대산면의 들판을 지나 낙동강에 닿았다. 수산대교를 건너 밀양으로 들어간다. ‘낙동강 살리기 16공구 사업’ 이라고 쓴 현판이 세워져 있고, 긴 관(管)이 달린 기계가 강바닥의 모래를 퍼 올려 땅 위로 쏟아내고 있다. 양쪽 강변을 따라 길게 줄지어 오가는 덤프트럭들이 강의 모래를 어딘가로 끝없이 실어 나른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4대강 사업’ 현장이다. 홍수를 예방하고 생태를 살리겠다는 구실로 총사업비 22조 원을 들여, 한강과 금강과 영산강과 낙동강에 보와 댐과 저수지를 만드는 대규모 환경 파괴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백산리와 명례리에서 하염 없이 공사 중인 낙동강을 바라보다가 밤을 맞았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서 북쪽으로 걷다가 히치하이킹으로 밀양 시내에 도착했다.       


  1980년, 조기축구회 새싹회는 밀양시 대표로 부산 주래국민학교에서 벌어진 축구 대회에 참가했다. 그날 새싹회는 서너 번의 경기를 거쳐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컴커무리해진” 저녁 폐회식 때 최우수상을 받은 선수는 우승팀의 공격수가 아닌 새싹회 “풀백(fullback, 수비수)” 박재수 씨였다. 의아해서 회장에게 물었다. 


  “아니, 이걸 공격수도 아닌 내가 받아도 되냐고, 그랬더니 하는 말이, 아, 본부석에서 개수를 셌는데, 헤딩으로 재수 씨가 오늘 막아낸 로밍볼(뜬 공)만 오십 개가 넘는다꼬, 이런 사람 상 안 주고 누굴 주겠느냐고, 그랬다고 하대. 이야, 그날 트로피를 받아서 안고 밤 열차에 타고 밀양 돌아오면서, 야,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수십 년간 축구를 했는데, 나도 이럴 때가 있는가, 싶더라꼬. “그리 오래 되도” 그날이 가장 좋은 순간이였고, “지금도 농(籠, 장롱) 위에 딱- 있는” 그 트로피가 아저씨 인생의 자랑거리이다.


  “서부 전선 최전방 28사단 9중대”에 복무할 때는 중대 대항 술내기 축구 대회를 했는데, “공 잘 찬다꼬” 중대장이 좋아하곤 했다. “사람들이 곧이 안 듣지만도, 철책선 보초 서다 크레모아 누질라가 간첩도 잡았어... 그때 받은 표창장도 아직 있는데...” 


  박재수 아저씨에게는 부모가 없다. 형제자매도 없다. “피난을 온 건지, 우째 된 건지도 모르고, 너무 어릴 때 밀양 땅에 와 갖고 쭉 혼자 살았다.” “경찰들한테 붙잡히가” 여섯 살 되던 해에 고아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영장을 받아 군대에 갈 때까지 자랐다. 밀양에 고아원이 세 군데였는데, 가곡동과 예림의 고아원은 그대로지만, 아저씨가 자란 ‘삼동고아원’은 “원장이 식구들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는 바람에, 폐지되 뿌고” 없다. 


  “고아원이 그대로 있었으면 고아원 출신들이 찾아도 오고 할 낀데... 그중에 잘 된 사람도 있거든. 같이 자란 우리들 원거지가 없어져버린 기지. 전-부 다 전국으로 흩어져 가꼬, 이제 다들 어디 사는지도 몰라... 내나 저그나 다 부모가 있나 형제가 있나, 뭐가 있나, 다 혼자서 살아야 되는데...” 

  형제자매와 매한가지인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어렵게 되어서, 떠올리면 슬퍼진다. 


  삼동고아원에서 지낼 때 소개받아 만난 아내와 결혼을 했고, 처갓집의 도움으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농사로 고생해서 일어섰는데, 마누라가 병이 나서 재산은 병원에 다 갖다 주고” 결국 사람도 죽었다. 

  “그랑께, 속으로 환장 안 하겠나?! 돈도 없제, 여자 없제, 그러니 맨 술이나 먹고...” 

  공터에 나와 앉아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얘기나 나누며 세월을 보낸다. 


  “일을 하고 싶어도 나이 먹으면 누가 쳐다보지도 않애. 오십만 넘어도 실업자들 천진데 누가 우리한테 일을 주겠노. 가진 거 없고 옳게 공부 못한 사람들, 알아주는 데는 아무데도 없다. 글쎄, 마누라만 안 죽고, 모아둔 돈이 좀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란지 모르지 뭐...”


  밀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과 딸은 마산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다. 

  “둘 다 결혼해서 맞벌이로 월급 받고 그냥 그냥 애들 데꼬 살고 있지. 내 주머니에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서 세상은 천지 차이야... 가진 게 없는데 내가 노력 안하면 누가 내 밥 먹여 주나...”



密陽

밀양의 옛 이름은 미리벌로서, 삼한시대 변한 12소국 중 하나인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나 추화군(推火郡), 밀성군(密城郡)이 모두 ‘미리벌’의 한자 표기에서 생긴 지명이다. 밀양강과 낙동강 유역의 기름진 평야에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고 취락 집단이 형성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작은 커피숍을 꿈꾸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