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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야옹 Oct 09. 2019

<조커>

영화일기

“웃는 남자”


그는 자꾸 웃는다. T.P.O.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 안쓰러웠다. 어릴 적 당한 학대의 영향인 것만 같았다. 울면 더 가혹하게 맞았다든가... 아서를 ‘해피’라고 부르며 웃기를 종용한 사람도 학대를 방관한 엄마였다. 클럽에서 스탠딩 코미디를 시작할 때, 지하철에서 남자들에게 희롱당하는 여자를 봤을 때, 버스에서 아이를 괴롭힌다고 애 엄마에게 오해받았을 때. 그가 웃음이 터졌던 상황들이다. 타인 앞에서 난감하고 위축된 상황들. 아서의 웃음에서 자기 방어적 성격이 보였다.


“웃기고 싶은 남자”


그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맹목적이리만치 확고부동했다. 언제부터 왜 갖게 된 꿈인지 정확치 않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게 인정받고 어울리고 싶었던 거라 추측해본다. 선천적 광기, 유년기 학대 경험으로 지독히 외로웠던 그다. 웃음에는 사회적 속성이 있다. 코미디는 코드가 맞아야 가능하다. 공감을 전제한다. 광기를 억누르고, 무리로 포섭되고자 한 마음. 그것이 아서가 맹목적으로 코미디를 좇게 된 내막이 아니었을까.


“약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목표도 의지도 확고한 아서. 그런 아서를 향한 폭력에는 악의도 동기도 없었다. 그저 돈없고 빽없고 약하고 만만하니까. 한마디로 동네북이었다. 영화에선 유색인종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아서의 심리상담가는 모두 흑인 여성이었다. 지하철에서 희롱당하던 여자는 동양인이었다. 흔히 백인 남성과 대비돼 사회에서 극히 취약한 계급으로 인식되는 집단이다. 아서는 이들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최약체’였다. 보는 관객마저 ‘저런 상황이면 나같아도 미치겠다’ 싶은.


“객관의 폭력”


그래도 아서를 가장 괴롭힌 건 물리적 폭력이 아니었다 생각한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정신병의 가장 힘든 점은, 멀쩡한 척 해야하는 거라고. 세상은 자꾸 그를 일반적인 범주 안에 가두려 했다. 살인도 ‘부자들을 죽여라’ 시위를 촉발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냐고 추궁했다. 결과를 보고 동기를 추측할뿐. 진짜 동기, 진짜 아서 따위엔 아무도 관심 없었다. 웃는 이유에 대해서도, ‘자기가 웃으면 남들도 따라 웃을 줄 아나’ 혹은 ‘광대짓의 일부’라며 비아냥댔다. 지극히 주관적인 아서에게, 세상은 객관적인 답을 요구했다. 혼자만 웃는 코미디는 코미디가 아니라며.


“광기의 해방”


아서는 결국 폭주한다. 인정받기 포기한다. 남을 웃기려 노력하기를 관둔다. 코미디는 주관적인 거다! “뭐가 그리 웃기냐” 묻는 사람에게 답한다. “이해하지 못할걸요.” 뒤엔 이 말이 생략된 게 아닐까. “그래도 아무렴 상관없어, 이젠.” 폭주의 전환점은 페니 플렉을 살해한 순간이었다. 다른 건의 살인들과 질적으로 달랐다. 우발적이지 않았다. 삐에로 분장도 하지않은 채였다. 페니 플렉은 또 다른 아서, 과거의 아서였다는 생각도 든다. 페니는 망상증 환자였다. 망상, 자기가 미쳤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해 반대로 세상을 왜곡해버리는 행위다. 아서도 한때 망상을 겪었다. 페니를 죽이며 아서는 말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광인과 사회"


영화를 두고 살인 두둔, 미화 논란도 있다. 감독도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그럴 의도는 없다. 그냥 깊이 곱씹어보고 싶었다. 아서 플렉이 원한 건 아니었겠지만. 분석받기보단 위무받고 싶었을, 왜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느냐고 떼쓰던 조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도 겹쳐진다. 광기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보다 중요한 건 어찌됐든 후천적 요소가 zero는 아니라는 점. 그 요소를 최소화하는 사회의 역할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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