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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야옹 Jun 20. 2019

타노스보다 무서운 것

길고양이 호스피스쉼터 '경묘당' 에서

‘랜선집사’란 말이 유행한다.

경묘당 '모카'

랜선은 인터넷망, 집사는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을 뜻한다. 랜선집사들은 인터넷으로 남의 집 고양이의 사진이나 영상을 즐겨본다. 1인 미디어 덕이다. 유튜브의 인기 고양이 채널은 구독자가 2백만을 넘는다.‘냥덕’을 자처하는 이들은 직접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그 문화를 향유한다. 최근 국내 반려묘 수가 급증한 덴 이런 간접경험의 영향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경묘당 '하늘이'

냥덕뿐 아니다. 너도나도 OO덕(후)을 자처한다. 덕질은 혼자 즐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SNS 인증은 필수다. ‘마블덕’들은 어벤저스 n차 관람 티켓을, 커피 덕후들은 두세 시간 줄서서 ‘겟’한 블루보틀의 로고를 찍어 올린다. 이들을 그 옛날의 ‘오타쿠’와 동일시하면 오산. 덕후는 더 이상 히키코모리와 혼용되며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다른 정체성을 드러내고 취향공동체 내 연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덕질’이 각광받고 있다.

식빵 굽는 모카

오타쿠의 본래 지칭 대상이던 ‘일본 애니메이션 애호가’들은 어찌 됐더라. 여전히 음지에 있다. 물론 그들이 이 에 불만을 품거나 반란을 획책하는 것 같진 않다. 늘 그랬듯 그들만의 행복을 좇을 뿐이다. 그럼에도 작금의 ‘덕후 전성시대’는 우려된다. 다양한 취향에 대한 관용보단, 취향 간 위계를 조장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다. 어벤저스, 블루보틀 후기의 홍수 속에서 그들과 무관한 취향을 드러내려던 엄지손가락들은 시무룩해진다. 업로드대신 조용히 하트 버튼만 누르고 다닌다. ‘나도 어벤저스를 봐야하나’, ‘성수동에 가야하나...’ 하며.

경묘당 '하니'

얼마 전 만난 고양이 애호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자기는 일본이나 대만의 고양이마을 같은 걸 꿈꾸지 않는다고. 고양이만 바글바글해지면 이들이 잡아먹는 참새 같은 종은 멸종할 거라고. 그건 새 애호가들에겐 재앙이 아니겠냐고.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처럼 복잡한 문제다. 태진아 선생님 말마따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 OO덕(후)임을 자청하기 전 돌이켜봐야겠다. 그 사랑의 대상이 특별한 취향을 가진 스스로였던 건 아닌지, 이로써 취향 간 위계를 긍정하고 재생산하고 있진 않았는지.

경묘당 '갓파'

덕후 전성시대가 이런 비극은 낳지 않길 바란다. 우리가 관용을 모르게 되는 비극, 누군가의 취향이 매도당할 때 그 사람이 자신이 아닌 걸 다행으로만 여기게 되는 비극, 내일이라도 그들과 섞이게 될까 그들을 이해하게 될까 몸서리치게 되는 비극. 그걸 ‘취향존중’이라 부르게 되는 비극적인 세상. 인피니티워 이후 타노스가 지배하는 세상보다 더 무섭다. (나도 사실 마블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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