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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야옹 Jun 20. 2019

나의 아픔을 알리지 말라

길고양이 호스피스쉼터 '경묘당' 에서

몬돌이가 아팠다.

호흡기 질환이 있는 몬돌이는 '아저씨'처럼 코를 골면서 잔다. 그마저도 귀엽지만. 

베테랑 봉사자들에겐 익숙한 상황이었다. 구내염, 호흡기 질환을 기본으로 달고 사는 애들이다보니 날마다 컨디션이 오락가락한다는 거다. 초보 봉사자였던 난 평소와 다른 몬돌이 모습에 어쩔 줄을 몰랐다. 몬돌이는 경묘당에서 제일 별명이 많다. 주방을 유난히 좋아하는 ‘주방요정’, 오동통한 볼살이 영락없는 ‘강호동.’ 그만큼 잘 먹고 활달했다. 그런 녀석이 종일 몸이 꽉 끼는 나무 궤짝에 틀어박혀 두문불출이었다.

주방요정 몬돌이 "간식 내놓으라냥~"

고양이는 아파도 티를 안 낸다. 조용히 은신처에 숨을 뿐이다. 야생성 때문이다. 아픈 걸 티냈다간 포식자에게 “나 잡아가소~”하는 꼴이니. 인간사회도 일종의 정글이라, 사람들도 종종 행복은 만천하에 자랑하되 불행은 감춘다. SNS상에선 특히 그렇다. SNS, ‘Say No Sadness.’의 약자인가 싶다. 그 공간에선 누구도 슬픔을 얘기하지 않는다. 행복 가득한 SNS에서 장시간 표류하다보면 내 삶이 비교적 불행해 보인다.

자는 거 아니얏 명상하는 거얏

SNS뿐일까. 우리는 속한 공간이 보기 좋고 아름다운 것들로 채워지길 바란다. 화장터나 요양원은 곤란하다. 그러나 ‘추(醜)’를 막다보면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추(醜)만 비껴가는 삶은 없기 때문이다. 추(醜)를 견디지 못하는 곳엔 추(醜)만 남는다. 길고양이가 경관을 해친다하여 먹이주기를 금지하면 배고픈 녀석들이 쓰레기를 파헤쳐놔 사태가 악화되듯이.

병원 검진 받을 때 밀린 털이 아직도...

살아있는 삶, 곧 슬픔과 고통이 함께 깃든 삶을 택하기 위하여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지과학 용어 중 ‘저(低)인지’라는 게 있다. 인류학자이자 심리치료사였던 고(故) 밥 레비의 타히티 연구에서 비롯됐다. 그는 타히티의 높은 자살률에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비통’이란 개념의 부재를 발견했다. 물론 타히티 사람들도 비통한 감정을 느꼈다. 다만 이를 지칭하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다. 그러니 정상적인 감정으로 여기지도, 치유도 못했다.

몬돌이 특유의 '쩍벌' 자세

어둡고 불편할지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라면 드러내야 마땅하다. 그래야 제대로 보고 고친다.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는 그 사회가 불행을 얼마나 까 보이느냐에 따라 가늠된다. 행복이 아니라.

몬돌이 손 시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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