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양이 호스피스쉼터 '경묘당' 에서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라는 표현에는 과장이 없다.
허언증 있는 조상들이 지어낸 표현이 아니다. 물론 나는 출산이나 육아 경험이 없다. 경묘당 애들을 보며 든 생각이다. 구내염의 고통 때문에 식사를 거부하는 애들이 많다. 얼마 전 무지개다리를 건넌 삼순이도 마지막 며칠간 음식을 하나도 못 넘겼다. 그러다보니 고양이들이 잘 먹기만 해줘도 그리 대견하고 감동적이다. ‘묘생’의 질은 식생활에 따라 상당부분 좌우된다. 길고양이의 수명이 집 고양이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이유도 영양부족 때문이다.
사람은 좀 복잡하다. 먹는 문제가 해결돼도 삶의 질이나 행복도는 천차만별이다. ‘엥겔지수’를 보면 알 수 있다. 총 지출 중 식료품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엥겔지수다. 전통경제학에서는 엥겔지수와 삶의 질을 반비례관계로 봐왔다. 저소득층일수록 문화, 여가 등 식생활 이외 용도의 지출이 줄기 때문이다. 엥겔지수의 기저에는 식욕을 가장 기본적 욕망으로 보는 관점이 전제돼있다. 생활수준이 아무리 낮아져도 음식은 포기할 수 없는 탓이다.
최근 엥겔지수는 경로를 이탈했다 한다. 국내 한 일간지는 개도국이 아닌 한국, 일본 등 국가에서 엥겔지수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도했다. 그 까닭으로 배달, 외식문화의 활성화, 식재료 가격 상승, 웰빙 열풍 등을 꼽았다. 진실이 뭐든, 엥겔의 추론은 한계가 분명해 보인다. 삶의 '전체 맥락'을 따지지 않고 한 부분만 수치화해 결과로 연결 지은 점이다.
‘먹방 열풍’또한 맥락에 눈 감으면 올곧이 이해할 수 없다. 먹방 유튜버 밴쯔의 구독자수가 3백만을 넘는다. 그 와중에 ‘남 (처)먹는 걸 왜 보고 앉았는지 모르겠다.’는 댓글도 적지 않다. 이 논리대로면 남 성관계하는 영상(포르노), 남 놀라는 영상(리액션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영원히 타인을 이해할 수가 없다.
혹자는 인터넷이 소통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한다. 끼리끼리의 소통은 분명 발달했다. 끼리끼리의 응집력이 강해질수록 배타적 집단간 소통은 단절된 게 문제다. 일베, 워마드 같은 극단적 집단이 점점 늘어난다. 극단적일수록 각광받는 곳이 ‘유튜브’다.
다른 이를 전체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마저 이해받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흉악범죄 기사란마다 ‘사형하라’는 댓글이 눈에 띈다. 사형이 답일까. 가장 간단해 보이는 선택지는 대개 오답이다. 맥락은 복잡하다. 따지는 데 시간과 정성이 든다. 비용을 절약하려 행정규정만 들이밀면 사회는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역사에서 맥락보다 효율을 좋아한 건 대개 독재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