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지 않음을 지향한다

붕괴 이후의 자리

by 는개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수사학>에서
모든 인간은 행복, 그러니까 에우다이모니아를 지향한다고 말했어요.

행복을 얻으려면 자신을 수양해야 하고,
그 과정을 그는 ‘성품의 탁월성’을 기르는 일이라고 불렀죠.


정직이나 용기, 관대함 같은 미덕을 익히고
감정을 조절하면서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상태로 살아가다 보면
인간은 결국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요.


말만 들으면 참 그럴듯해요.

차분하고 단정하고,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더 오래 마음에 남기도 했어요.


그런데요,

지금의 저는 행복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냥 우울하지 않으면 됐다, 정도랄까요.


어릴 때는 행복이 유토피아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고,
한번 도착하면 계속 머물 수 있는 상태 같은 거요.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그 ‘행복이라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일인 줄 알았어요.

꿈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우울하지 않으면, 그게 행복인 걸까?

우울증이 나아지면, 그게 행복해지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은
성품을 수양하고 미덕을 쌓아서 도달해야 하는 어떤 상태였겠지만,
지금의 저에게는 그 윤리가 잘 작동하지 않아요.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도 없고,
어디쯤 와 있다는 감각도 없는 상태에,

사실 치료하기 위해 쓰는 모든 약들은 감정의 진폭을 줄여주는,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감정이 없어지는 약들이거든요. 슬픔이 없는 대신 기쁨도 없죠. 울지 않는 대신 웃지도 않아요. 감정이 격량을 겪지 않으니 편하지만, 잔잔함을 느끼는 능력도 없어요.


이런 저에게
행복을 목표로 삼으라는 말은 너무 멀게 느껴졌어요.
너무 크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많이 버겁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표를 낮췄어요.

더 이상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기로.


대신, 우울하지 않기만을.

하루를 어떻게든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것조차 잘 안 되는 날들이 계속돼요.
병원도 꾸준히 다니고 있고, 치료도 이어가고 있는데
딱히 나아지고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그러다 보면 또 같은 생각으로 돌아가요.
제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노력이 부족한 건 아닐지,
이 우울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될 건.


지금의 저는 그런 질문들 한가운데에 서 있어요.

행복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윤리는 이미 무너졌고,
남아 있는 건 우울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아주 많이 낮아진 목표뿐이에요.


이 글은
그 붕괴 이후의 자리에서,
아직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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