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 위에 지쳐 쓰러져 좌절하던 나를 일으켜 세운 아이의 꿈
S# 17 다시 연필은 일어나 쓴다
S# 17 H 대학교 연극영화과 실기시험장 앞 (낮)
+ 나의 사무룸 (낮)
실기장을 안내하는 여러 안내문과 표식들
실기응시 학생들이 정신없이 북적북적하다
긴장한 얼굴의 하늘, 나에게 전화하는.
전화 연결음과 함께 화면 넘어오는.
하늘(F) 쌤 진짜 너무 떨려요. 어떡해요?
나 긴장되는 게 당연하지.
준비한 만큼 보여주면 돼!
하늘(F) 저 꼭 잘 돼서 쌤 드라마 찍을 거예요!
주인공 시켜주신다고 하셨잖아요ㅎㅎ
나 (웃음) 그랬지.
하늘(F) 그럼 제가 그 정도가 되어 있어야 하잖아요
그니까 꼭! 합격해야 해요 ㅠ_ㅠ
나 하늘. 꼭 대학에 가야 배우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연기 잘하는 사람 모두가 대학 출신은 아니잖아.
너무 압박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고 와.
동동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는 하늘 목소리 들린다
하늘 목소리 들으며 웃으며 다독이는 나.
하늘(F) 전 꼭 합격해서 열심히 크는 배우가 될 거예요.
졸업할 때까지만 기다려주세요. ㅎㅎ
나 하늘.
꼭 대학에 가야 배우 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러면 일단, 실기부터 보고 오자 (웃음)
나는 늘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아이들에게는 꿈을 꾸라고, 실패해도 괜찮다고, 꿈이 없어도 괜찮다고,
너는 너의 존재만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나 그 말은 언제나 내 입술에서만 맴돌았다. 내 안에서는 늘 의심이, 좌절이, 겨울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사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라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그건 차가운 기계소리 같은 말이자, 이미 힘을 잃은 껍데기였다.
잘 보고 왔다며 너무 밝게 웃는 아이의 목소리가 곧 들려왔다. 느낌이 좋다며, 겨울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떨림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내 입에서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얼마 후, 결과가 나왔다며 하늘은 연락을 취해왔다.
그 학교는 떨어졌다고. 하지만 다른 학교의 비슷한 과에 합격했다고.
아이의 목소리가 그치고도 한참 동안 떨어졌다는 단어는 내 앞에 돌덩이처럼 놓여 있었다. 나는 그 단어를 오래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쌓아둔 아이디어 폴더를 뒤적였다. 오래 묵혀둔 소재 하나를 꺼내냈다.
또 한참 후에 연필을 들었다.
굳어 있던 손끝이 풀리며 연필은 로그라인을 적고, 트리트먼트를 써 내려갔다.
곧 다시 문자가 도착했다. 내년에 꼭 다시 도전하겠다고. 내년에 반수도, 될 때까지 삼수도, 사수도 할 거라고.
아주 비장하기까지 한 하늘이의 얘기에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리곤 네가 졸업할 때까지 나도 멈추지 않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순간, 나는 점점 성장해 나갈 하늘의 모습을 상상했다.
무대 위에서 눈빛을 반짝이며 대사를 뱉는 모습.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붙잡는 모습.
그 상상은 내 안에서 꺼져가던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여전히 나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의 진심은 믿었다.
그 믿음은 내 손을 다시 연필로 이끌었다.
위로는 내가 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때때로 이렇게 수많은 하늘이들에게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