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려는 날이 늘어난다

괴로워하는 나도, 괴롭지 않은 나도 견디면서.

by 는개

오늘도

인연을 먼저 끊은 이들이 생각나 거기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2005년 5월 21일 17시 30분에 일어난 일에

523번째 마음이 파 먹히고 있는 중입니다.


괴로움의 정도는 전혀 약해지질 않아요.

대체 나는 왜 이럴까요.









지금은 많이 나아져서

죽고 싶지는 않은데

... 살기가 너무 싫습니다.


죽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리는 건 아니라서

이를 위한 시도를 하거나 준비를 하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필요시로 먹는 수면제를 3주 치를 처방해 주신 걸 보면

확실히 나아졌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일상의 괴로움은 덜어지지 않고

위로도, 기대도 받지 못해요.


살아야 한다면 현재를 살고 싶은데

매분 매초 과거에 지배당하면서 삽니다.


나를 괴롭히는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의 내게서 과거를 골라내보기로 했습니다.

쭉정이 건지듯 건져서 그것들을 몽땅 버리면

현재만 남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들을 적어 보다 보면

나는 여태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책상에 노트를 펼쳐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막상 쓰려니까 막막하더라고요.


한 번도 글을 쓰며 솔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공을 했고, 작법을 배우러 계속 다녔어서

제가 써내는 글은 늘 평가자가 있었습니다.

그 평가자가 어떻게 볼까, 의식하면서 썼었어요.


솔직하게 쓰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전부 다 적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에세이 같은 교술장르는 허구를 전제로 하지 않지만,

저는 의도적으로 늘 밝고 따뜻한,

양지에 핀 민들레를 보는 것 같은 글을 썼었어요.

대부분의 독자는 문학장르라면 어두운 것보단 밝은 걸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늘 마음을 제대로 끄집어내어 쓰지 못했어요.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종이와 펜 앞에서 자유로워진다는데 나는 오히려 닫혀있었어요.

거스러미 하나까지 박박 긁어 쓴다는 분들의 에세이를 보며 그렇게 그렇게 부러워하면서도 어떻게도 솔직하게 쓰지 못했습니다. 학점이건, 공모전이건, 백일장이건, 합평이건, 연재를 하건, 어떻게든 호감을 사야 했습니다. 상금이 걸려있었고, 장학금이 걸려 있었고, 상급반 진학이 걸려있었으니까요.


말로는 조금도 돌려 말하지 못하고 언제나 누구에게나 거짓말을 못하고 직설적인 성격이면서, 10대일 때부터 열쇠가 달린 일기장 앞에서도 솔직할 수 없었던 건 늘 '보는 사람'을 신경 쓰는 글쓰기를 해 왔던 것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괴롭고 알 수 없어 끙끙대는 번뇌를

종이에 토해보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지만

잘 되진 않았습니다.


나는 여전히 종이가 두려운 사람인 걸까.

아니면 이제는 종이도 나를 거부하는 건가.


거부하는 건가

거부, 당하는 건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겨우


나 자신조차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아주 작은 글씨로

겨우


하나를 썼습니다.

겨우


버리기 위해 쓴 건데, 뭐가 그리 힘들다고.

버리지를 못하고.


구기지도 못하고 쥐고 있다가

또 한참을 쥐고 있다가

그걸 찢었습니다.


하지만 찢고서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쥐고 있다가

쓰레기통 위에서 힘을 뺐습니다.

천천히 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손가락들을 겨우

폈어요. 그리고 제 손에 있던 것이 쓰레기통에 안착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물건을 버렸습니다.

좋아하던 사람이 만들어 준 예쁜 머리핀이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좋아하지 말아야 하는 사람이 준,

8년을 가지고 있던 핀을 함께 버리며

날 버린 사람이 준 좋은 기억 속에 갇혀 괴로워하는

백만 개의 싫은 '나' 중 하나를 버렸습니다.


겨우겨우 조그맣게 하나를 버리고

좀 더 싫어하는 것들을 적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몇 주가 흘렀습니다.


꽤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빈자리가 너무 적어요.

버릴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거겠죠.


과거에 시달리며 갇혀있는 내가

너무 괴롭고 한심하지만....


그래도 하나라도 버렸으니

나아갔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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