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혐오의 기원

왜 나는 나를 왜 싫어하게 되었던가

by 는개

본가에 있던 아주 낡은 냉장고가 새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전부터 너무 낡고 오래된, 냄새나는 그 냉장고를 바꿔주고 싶었어요.


할부로 얼마를, 제품은 얼마짜리를,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어떤 명절 이후,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필요하면 다 사게 되어있다고 참고 나중에 진짜 필요할 때 주라고, 참으라고, 반려가 말해서 참아봤어요. 제 배우자는 나를 배우게 하는 사람이거든요. 어차피 같이 사는 게 아닌데 대형 가전을 사는 문제를 전화로 얘기할 수도 없고, 다음 방문 때나 얘기할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솔직히 쉽진 않았어요. 그 마음을 참는 것이.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인데 방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꽤 자주 저를 괴롭혔어요.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들었던


"큰 딸이 되어서 고등학교 졸업했으면 집안 살림에 보탤 생각을 해야지"

"부모가 저리 고생하는데 철딱서니 없는 생각만 하고 있니!"

"밑에 동생들 생각도 해야지, 넌 장녀잖아."


라는 말들이 환청처럼, 이명처럼 날카롭게 제 귀를 할퀴는 몇 달을 보냈어요.


하지 않으면 욕먹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찾아서 하며 잠시(솔직히 잠시는 아니었습니다만) 참고 참았습니다. 반려가 참으려고 한 이유가 있겠지 싶어서요.


그다음 명절에 갔더니 새 냉장고가 있었어요.

냉장고가 바뀐 것도 바뀐 거지만 그거보다 저는 제가 몰랐다는 게 더 묘하게 다가왔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본가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알게 됐었어요. 아빠가 너는 장녀니까, 하며 따로 불러 현실적 집안 사정이라든가 하는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어른세계의 일들을 일러주는 말을 들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쓸 데가 있던, 쓸데가 없던 집안 대소사를 알아야 했어요.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동생들은 엄마아빠 없으면 언니가 아빠고 엄마라고 하는 얘기들을 들어야 했죠.


그런데, 몇 푼도 아닌 냉장고가 바뀌어 있는데 내가 모르다니.


이상했어요.


조금, 아니

많이

이상했습니다.











나는 사실 맏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비글에 가까운, 너무 명량명랑한 엔프피인 저는 누군가를 재밌게는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믿음직스럽게 누구를 이끌고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맡겨진 역할에 어쩔 수 없는 마음으로 하는데, 최선을 다해도 제가 부족하다 보니 늘 트러블이 많이 일어났고 문제상황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그게 모두 나 때문인 것만 같아서 집에 와서 매일 울었어요.

내가 원한 것도 아니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먼저 태어났을 뿐인데, 부모가 없으면 동생들에게 부모여야 하는 '언니다움'을 강요당했어요.


그러면서 하는 말들이 맏이는 길러지는 거라고. 못하면 다 제가 부족한 탓이랬어요.

부족하다고, 왜 그것밖에 못하냐고, 왜 이렇게 무책임하냐고, 하는 아주 많은 부족함 중에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맏이, 언니, 누나의 역할.


그 냉장고가 기점이 되어 거꾸로 되짚어가 보니 이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알았어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들의, 시집간 딸을 대하는 태도에서 오는 이질감이었어요.

시대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고 아빠와 그렇게 부딪치고 지겹게 다투어댔던 모든 것들이 이젠 뒤집혀 다르게 보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한참 세상의 화두였었던,

[설에 이쪽 집을 먼저 갔으면 추석엔 저쪽 집을 먼저 가야지]를 가지고 배우자와 다투는 저를 보고 등짝을 내리치며 당연히 시댁을 먼저 가야지, 라며, 서운한 말만 하던 엄마의 말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결혼하고 몇 달 안 되어 내 명의로 되어있던 가족들의 모든 보험증서를 비롯해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던 명의가 거의 본가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막냇동생에게 넘어갔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의 생각을 이해 못 해 싸우고 대들기만 했는데 바로 전근대적 사고방식으로 행해지는 부모님의 (특히 아빠의) 행보가 저를 이상한 기분에 빠뜨렸습니다.


새삼 다른 게 없는데,

이제 집을 나와 산 세월은 부모와 같이 살던 세월보다 길고,

내가 내 집의 세대주가 된 지 너무 오래됐는데.

그저 주소를 이전한 세대주가 되는 일에 서류한 장 접수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결혼인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뿌리 뽑힌 부표가 된 기분이었는데 역으로,

내가 나도 모르게 얼마나 많은 걸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듬더듬 심해 같은 과거를 짚어보고 떠올려보며 제가 저를 싫어하게 됐던 기원이 혹시 이거였을까, 하는 의문이 피어났어요. 알고 있는 확실한 이유 중 가장 큰 건 제가 너무 부족하고 모자라서였는데 혹시 이 흐름이 관계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정말, 내가 가진 나 스스로에 대한 혐오는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분명 하루 이틀 내로 생기지 않은, 먼지처럼 켜켜이 쌓인 습작의 결과일 텐데.


오늘은 우울이도 말이 없습니다.

조금은 무겁지 않게 마음을 메고 깜깜한 과거를 헤엄쳐 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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