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질까 봐 무서운 나날들의 공포.
맑지도, 흐리지도 않은 오후.
여지없이 찾아온 우울이와 함께 있느라 가라앉아 있는 나에게
어느 날 배우자가 산책을 권유했어요.
손 잡고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걷다가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걷다가 이야기가 끊기다가
딱히 말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걷자고 애써 밖에 데려 나온 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했습니다.
대답을 했다, 안 했다.
걷다가 멈췄다가.
거기에 발맞춰주던 그가 말했어요.
지금을 즐긴다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서 늘 같이 있는 지금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내 걱정을 안 헸을 거라고.
지금만큼 걱정하고 챙기지 못했을 거라고.
지금을 즐기자고 나의 배우자는 말했습니다.
갑자기 맥락도 없이 나온 목소리에
우울이에게 쏠려있던 내 시선이
온전히 그에게로 갔어요.
몰랐어요.
이별의 말인가.
헤어지자는 말을 저렇게 하는 걸까.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 만찬인 건가
사실 너무 바란 거 아닐까,
내가 그럴 만한 것도 아닌데 불평하고 있나.
내가 혹시 선을 넘었던가.
적반하장으로 행동하고 있는 거 아닐까......
잡고 있는 손에서 힘이 풀렸습니다.
하지만, 풀린 손이 꽉 잡히는 느낌은 없었어요.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앉았습니다.
역시, 인간은 변하지 않아요
몰아치는 생각들을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맥없이 휘둘렸습니다.
약은 개뿔, 치료는 무슨.
인지 치료고 상담이고 대체 무슨 소용인가.
병원을 다녀서 무얼 하나.
몇 년을 다니고 삼킨 약이 얼마인데
여전히 나는 이렇게 나의 과거를 흘러가게 만들었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있는걸.
사실 너무 바란 건 아닌 게 아닐까.
생각들은 나를 빠르게 점령했고, 그 새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책상 위에 있던 약봉지가 보였어요.
봉투 안에 진료실이 보였습니다.
진료실에서 선생님이 했던 말이 들렸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에요."
심호흡을 하고, 선생님이 가르쳐줬던 말을 공식처럼 중얼거리며 떨리는 손을 움켜 잡았습니다.
근거리의 기억들을 헤집었습니다.
솔직히 아주 잘해준다? 고 하기에 모호한 것들이 몇 개 떠올랐어요.
음식 할 땐 쫓아와서 쓰레기를 모아 버려 주고(아니 다 먹고 치우면 될걸...)
요리를 다 하고 나면 가스 밸브를 잠그고 (어차피 설거지하러 나오는데 그때 하면 되지, 면 퍼지게...)
밤엔 이해하는데 굳이 낮에도 무조건 같이 나가려 하고(아무리 위험해도 낮에 위험하겠냐고...)
맥주를 마시려 치면 자꾸 잔소리 해대고 (겨우 두 캔째 따는 건데 너무 눈치를 준다던가...)
엔진오일 갈아야 할 때가 되었고, 전기세는 얼마나 나왔고 (자동이체가 알아서 가져갈 텐데 굳이...?)
이게 잘해주는 건가? 생각하다가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딱히 그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나를 침해한다거나 굳이 알 필요가 있는가 했던 행동들이 사실은 잘해주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바로바로 와닿지 않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이혼하게 되면 서류문제가 있으니 어떻게든 한 번은 볼 테니까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생각하면서도,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빗장을 걸고 쇠사슬을 칭칭 감아 놓고 있었던 것 아닐까
에 다다랐습니다
이 의심스러운, 머릿속에 혼란감만을 주던 마음이 그의 잘해준다는 마음이었다는 걸
자신이 안 보이면 불안해하는 나에게 언제나 있는 곳에 있으며 잘해주겠다고.
지금 이 기간을 즐기겠다고 생각한 지는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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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은 또 내 문제입니다.
입으로 계속 구구단을 외우듯 중얼거렸습니다.
너무 바란 건 아니야.
나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랴
그가 내게 잘해주는 방식이야.
이게 잘해주는 건가 생각하다가도 멈추고,
내가 인지하는 내 사고방식이 잘못된 건가 아닌가 의심하다가도 멈췄습니다.
결국
잘해주는 건지 아닌지 확실히 구분해내진 못했어요.
하지만 멈춰서 생각해 보는 데까지는 왔습니다.
오랫동안 괴로워했지만 결국은 정의하지 못하고 영영 공백으로 사라질 감정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해도 끊임없이 정의하려 들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이란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대도 포기하지 못하고 뭐라도 해 보려 하는 어리석은 존재라고, 카프카의 소설이었던가. 어디서 읽은 기억이 나요.
나 역시 그런 거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만을 더듬다 끝내 추락해 버린다고 해도
그래봤자 한낱 인간이니까.
내 자신이 너무 괴물 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