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동업을 제안받아 갑자기 대리운전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연고도 없는 천안으로 내려갔지만, 대리운전 사업은 본인의 원래 직업만큼이나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늘 수심이 가득한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고, 아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 서울에서 천안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면 천안 버스터미널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어쩔 수 없이 눈에 띄고 마는 대형 옥외 광고를 보며 입안이 쓴 걸 느꼈다.
‘유명 연예인이 왜 대리운전까지 하고 난리야......’ 아무튼 그땐 너도 나도 대리운전을 하겠다는 열기가 대단했다. 세상엔 기억하기 좋은 번호들이 수두룩했다. 아빠가 가진 번호만 좋은 게 아니었다.
이사했다고 해서 불려 간 천안의 집은 무슨 무슨 아파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파트라고 해서 번듯한 곳으로 이사했나 했더니 주소를 찍어 도착한 곳은 쓰러져 가는 단독 주택이었다. 원래 이 층짜리인 하나의 집을 아래층 위층으로 굳이 나누어 두 가구가 사는 거였다. 1층에 사는 집주인은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얼마나 날림으로 만들었는지 올라갈 때부터 험난한 경사에 제정신으로도 똑바로 올라가기 힘들었다. 결국은 술을 진탕 먹고 귀가하던 아빠의 코를 깼다, 그 계단이.
외관뿐 아니라 집 안도 꼴이 엉망이었는데 방마다 높이가 달라 높은 턱을 올라 다녀야 하는 건 그렇다 쳐도, 부엌이며 화장실이며 허름한데 어두침침하기까지 해서 집안으로 으스스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그런데도 아빠는 식탁 옆에다 첫 직장에서 퇴사할 때 받은 소속 아티스트의 싸인 포스터를 떡하니 붙여놔서 말문이 막혔다. ‘유영 언니 인도 잘 다녀오세요,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그런 게 쓰여 있었다. 바닥으로 깨알 같은 개미들이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를 긴 줄을 만들고 있는데.
그 집이 싫었고 그래서 자주 내려가지 않는 사이 그곳에서 아빠와 같이 살겠다며 조촐한 짐을 푼 사람이 있었다. 상처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끌리는 자기장이라도 형성되어 있는지 같이 살게 된 아줌마도 험난했던 인생을 글로 적자면 장편 소설로다가 책 두세 권쯤은 거뜬히 넘길 만큼 사연이 많은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남편 또한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 안 그래도 몸과 마음이 매우 허약했던 아줌마는 자살 시도까지 하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나는 늘 외롭고 힘들어 보이는 아줌마를 위해 같이 술도 마셔주고 같이 담배도 피워줬지만, 한편으로 아빠가 좀 더 행복한 사람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슴 한편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줌마가 집에 있으면서 후진 외관은 어쩔 수 없더라도 집안 구석구석 손 안 닿는 곳 없이 락스로 박박 닦고 걸레질을 해가며 부지런을 떨어 준 덕에 그나마 사람 사는 집처럼은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여실히 드러나는 이 집의 가난과, 돈을 쓰는 방법이 아무래도 평범한 사람과는 사뭇 다른 아빠에게 천천히 지쳐가는 아줌마의 모습을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오갈 곳이 없어져서 일단 이 집에 들어오긴 했지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하고 잘 나갔던 본인의 과거와 자꾸 비교가 되었을 것이고, 아빠와 손발 맞춰 가며 대리운전을 한 번 잘 꾸려가 보겠다고 천안의 술집들을 돌며 명함과 박하사탕을 채워주는 일은 본인이 다 하는데, 돈 없다고 자동차 기름을 안 넣어주는 그런 어이없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일련의 작은 사건들은 알고 싶지 않은데도 매일 그녀로부터 걸려 오는 전화로 속속들이 알게 되었고, 직원들이랑 회식하고 다닐 돈은 있는데 가스비랑 수도세는 3개월 치가 밀려 곧 끊기게 생겼다는 말을 들으며 ‘아빠랑 제발 헤어지세요’ 그 한 문장을 말하지 못해 나는 소주만 마셨다. 어느 날은 월세를 못 내서 쫓겨나게 생겼으니 30만 원만 빌려 달라고 전화를 받고, 또 어떤 날은 니 아빠 돈 없어서 염색도 못 하고 허연 머리로 다니는데 너만 맛있는 거 사 먹지 말고 돈 좀 부치라고 전화를 받으면, 난 그대로 편의점으로 가 담배랑 제일 싼 라이터를 사서 가족이 없는 편이 차라리 낫겠다며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며 멍하게 지냈다.
내 인생에 고비가 찾아왔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제껏 살아온 전부가 다 고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수많은 고비를 겪으며 살아온 것 같았다. 한고비가 가면 또 다른 고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이 즐겁다고 대체 누가 말하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늠해서 목청 놓아 우는 사람이 나였다. 지하철 안에서, 길을 걷다가, 집 현관문을 열기 전에도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회사에 가려면 버스에서 내려 명동성당을 거쳐 10분가량을 걸어야 했다. 여느 출근길처럼 명동성당 앞을 걸어가다 갑자기 우뚝 멈춰서 그런 생각을 했다. 행복해지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저기 성당 안에 들어가서 저기 안에 있는 신에게 빌어야겠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렸을 때 참 많이 기도를 했었는데요, 유영이라고 하는데 저 기억나시나요.”
나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세상에서 제일 아파도 되고, 세상에서 제일 가난해도 되고,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도 된다. 그렇지만 제발 우리 아빠만큼은 돌봐달라, 돈 좀 많이 벌게 해 달라, 일 좀 잘 되게 해 달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렇게 애원했다. 그때 나는 건강한 정신이 아니었다. 증오와 슬픔이 온몸과 정신을 휘감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힘든 것보다 누군가를 배신할 수 없는 게 더 힘들었다. 지금부터 그냥 모르는 사이 하고 싶은데, 아무 일 없다는 듯 ‘이제 안녕’ 말하고 훌훌 떨어져 나가고 싶은데, 그 간단한 게 할 수 없는 거라서, 그게 나의 아빠라서 너무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