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에는 내 생일도 있고 엄마의 생일도 있고 엄마의 기일도 있다. 5월은 항상 우울하지만 음력으로 세는 엄마 제삿날이 스물아홉 번째 내 생일과 같은 날인 걸 깨닫고 나니 우울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아빠가 아줌마와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엄마 제사상을 아줌마가 차렸는데 나는 그게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싫었다. 내가 나서기도 뭐하고 안 나서기도 뭐한 아무튼 뭘 해도 눈치가 보이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우리 엄마 제사상인데 내가 차렸을 때처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엄마의 기일과 내 생일을 일주일 앞두고 아줌마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집에서 오는 전화는 계속 피하고 있었는데 벨소리부터 우울한 그 전화가 또 걸려 왔다.
“다음 주 엄마 제사인 거 알지? 너네 아빠가 벌어오는 돈이 없어서 제사상 차릴 돈이 없다 유영아. 그런데 너 그거 아는지 모르겠는데 너네 아빠가 라이온스 클럽인지 뭔지 들어가지고 혼자 폼은 다 잡고 돈은 있는 대로 다 쓰고 다닌다, 그런데 왜 나 살림하는데 돈은 안 주니. 꼴 보기 싫어 죽겠다, 나 여기서 못 살겠다 유영아. 나 너네 엄마 제사상까지 차려야 하니? 나 못한다, 나 못해.”
죽고 싶었다. 엄마가 죽은 것처럼 나도 죽고 싶었다. 엄마는 죽었는데 나는 왜 살고 있나, 나는 왜 태어났나, 내 생일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사람은 하나같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지들 생각밖에 안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전화를 끊고 집에는 다시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남은 29살을 요란하게 보냈다. 남자들에게 집착했고, 술을 물처럼 마시고 다녔다. 테킬라나 보드카 같은 독한 게 좋았다. 술을 마시러 서울에서 다른 지방까지 원정을 다녔고 모텔비로 월급을 탕진했다. 얼마 벌지도 못하면서 유흥비로 빠져나가는 돈은 지역 경제를 살릴 판이었다. 여러 남자들을 만나보니 BMW나 할리데이비슨 같은 오토바이를 타는 남자들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이렇게 죽어버리면 좋겠다 생각했다. 200킬로씩 내달리니 죽기 딱 좋았다. 그런데 그들은 끝까지 한 번을 넘어지지 않았다. 프로였던 것이다. 죽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토바이의 짜릿한 맛을 알고 나니 250cc 이상의 오토바이를 직접 운전하고 싶어, 소형 면허를 따기로 마음먹었다. 서울 저 끝자락에 붙어있는 운전면허 학원을 끊고 생전 처음 타는 노선의 지하철을 타고 생전 처음 가 보는 동네를 몇 번씩이나 오갔다.
첫 연습이 있던 날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맞으며 노란 우비를 입고 오토바이를 탔고, 비가 그치자 학원에서는 흙과 풀의 싱그러운 향이 돌아다녔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이 대기자실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시기에 소형 면허를 따려고 학원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여자는 나 하나였고, 모두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거나 아니면 여자가 저렇게 큰 오토바이를 탈 수나 있겠어 얕잡아 보는 눈으로 바라보길래, 멋있고 폼나게 잘 타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나는 겁이 너무 많았다.
비가 많이 오던 날 연습을 하다가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미끄러지면서 넘어졌고, 오토바이가 다리 위로 떨어졌는데 무거워서 혼자서는 들어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강사가 놀라서 뛰어왔고 오토바이를 들어 올리며 “그러니까 여자가 뭘 이런 걸 딴다고 그래요?” 짜증 섞인 소리로 말했다. 부끄럽고 당황한 나머지 다친 데 없냐고 묻는 강사의 질문에 대답도 못 하고 그 길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니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고, 그제야 다리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을 알았다. 오른쪽 다리였다. 검은색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찢어진 바지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피를 보니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고 무서워졌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내 인생......’
같이 버스에 탄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끝까지 앞만 봤다.
집에 와 상처를 확인해 보니 별로 심각한 것 같지 않아 혼자 치료했다. 뭘 잘했다고 병원까지 가나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시퍼런 멍이 다리 전체로 퍼져 나가길래 다리라도 잘라야 되는 거 아닌가 겁이 덜컥 나서 뒤늦게 병원을 찾았다.
“앞으로 오토바이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고, 다치자마자 빨리 꿰맸어야 했는데 제시간에 치료하지 못해 흉터가 크게 남을 거라 덧붙였다.
“이 상처 보면 후회하죠, 오토바이 탄 거?”
의사가 물었다.
“후회요? 안 해요. 상처로 치면 이것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수도 없이 달고 살았어요.”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는 대답.
다친 걸 후회해서는 아닌데 한 번 넘어지고 나니 무서워져서 그 이후로 학원을 한 번도 못 갔다. 미리 낸 학원비가 너무 아깝네 생각이 들면 꼭 강사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도 수업 안 올 거냐고.
오토바이에 매달려 지옥 같은 29살을 겨우 겨우 견뎠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 생각만 했다. 잘 타보고 싶었
다. 바람처럼 빨리 달리고 싶었다. 응원해 주는 이들도 있었고, 위험하다며 다시는 안 보겠다는 이들도 있었다. 슬픈 일들이 많았다. 이 상처는 영광의 상처가 될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나는 살기 위해 뜨거웠다고. 힘든 시기에 지지 않기 위해 열정적으로 싸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