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2주간 연차를 내고 인터넷으로 고심해서 고른 오렌지 색 배낭을 달랑 메고(그래도 10킬로그램이 넘었다) 혼자 전국 일주를 나섰다. 총 9개의 도시를 찍는 여행이었다. 울진에서 대게를 먹으며 시작해 군산의 유명 빵집에서 끝나는 일정. 춘천 어느 식당에서 혼자 닭갈비에 맥주를 시켜 먹고 나왔더니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바로 여행 일정을 짰다.
버스로만 이동했고, 잠은 주로 찜질방에서 잤다. 민박이나 모텔은 여자 혼자 가면 잘 받아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살이 유행인 것 같았다.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선박회사의 사장님은 힘내라고 도가니탕을 사주었고,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직장 사수는 일부러 찾아와 담배 한 보루와 인스턴트 죽이 담긴 편의점 봉지를 손에 들려주고 떠났다. 기다리는 게 익숙한 여행자이므로 버스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는다.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거기서 영원히 기다려봤자 버스는 오지 않을 거라고 알려주기 전까지는. 바뀐 버스정류장까지 안내 후 다음 일정까지 확인하고 수정해주는 정 많은 할아버지를 만나기도 했다.
여행 중 통영이 제일 좋았고, 중간에 큰 비를 만나 아
무도 없는 비 오는 검은 바다를 전세 내고 보는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를 그런 걸 겪기도 했다.
내 머리엔 엄청 큰 땜통이 있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을 때 도랑에 머리부터 떨어진 나를 아빠가 가슴에 안고 무작정 달렸단다. 병원에 도착해서 의사에게 들려 보내니 나는 안았던 티셔츠 앞섶이 온통 피로 젖어 있었다 했다.
나는 이 스토리를 좋아한다. 나를 사랑하는 아빠의 뜨거운 품이 전해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들었던 이 이야기를 여행 내내 많이 떠올렸다.
어떻게든 아빠를 받아들이고 싶었다. 내가 그를 용서해야 이 힘든 날들이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용서하기 위한 그 여행을 하는 동안, 아줌마는 집을 나갔다고 했다. 나간다는 말도 없이 나가서 진짜 나간 줄 모르고 있었는데, 잠깐 집을 비운 사이 짐을 모두 뺏길래 그제야 나갔구나 했단다.
아줌마가 행복해지길, 진심으로 바랐다.
전국 일주의 시작은 교통 체증과 함께 했다. 동서울에서 울진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생각지 못했다. 이제 막 시작한 여행인데 고속도로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지친 기분이었다. 밤늦게 울진에 떨어져 미리 검색해 둔 죽변항에 위치한 대게집을 찾아갔다. 식당 안을 몇 번씩 들여다 보아도 혼자서 먹는 사람은 한 명도 없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기까지 작아져만 가는 용기를 열심히 붙잡아 매야 했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혼잔데요.”
혼자서 대게로 포식을 하고 나니 잘 곳이 문제였다.
먹는 내내 나를 힐끔거리던 식당 주인아저씨가 물었다.
“아가씨 어디서 오셨어요?”
“아, 서울에서 왔습니다.”
“밤이 늦었는데 잘 데는 있어요?”
“근처 잘 데 있나 이제 알아보려고요.”
“허허, 큰일이다. 지금 울진에 큰 대회가 있어서, 전국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요. 근처 모텔이고 뭐고 다 방이 없을 텐데.”
“아, 그래요?”
“있어 보자, 옆집 민식이네, 거기 방 하나 안 비나?”
“아, 전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볼게요.”
“허허, 아가씨 큰일 날 소리 하네. 위험하다, 요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누가 더 위험한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주인의 지인인 민식이 아저씨 집에서 신세를 지는 걸로 이야기가 흘렀다. 끝까지 돈도 받지 않겠다 했다. 다만 그 집에서 자기 위해 식당 주인 부부와 민식 아저씨 내외가 함께한 술상에서 새벽까지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피곤이 온몸을 덮치고 있었다. 먼저 실례하겠다고 빠져나와 나에게 내어준 방에 몸을 눕혔다.
동틀 무렵 만취한 민식 아저씨가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왔고, 멋대로 이불을 펴고 셔츠를 훌렁 벗고 쿨쿨 잠드는 걸 쿵쿵 뛰는 놀란 가슴으로 숨죽이며 보고 있어야 했다. 나는 일이 터졌구나 생각했고, 이 남자가 나를 덮치면 어디를 어떻게 치고 내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그 방은 항상 비어 있는 곳이라 술 취하면 습관적으로 들어가 자게 된다고 엄청 미안해하며 해명했다.
“으이그 미쳤나, 이 양반이!”
민식 아저씨네 아줌마가 더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이고야 미안해서 어째, 아가씨.”
위험천만했던 남자와의 동침도 평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보다 내 머릿속에 더 오래 남아있던 건 그 전날 밤에 본 죽변항의 야경이었다. 죽변항의 야경 감상은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가게 된 것이라 더욱 뜻깊었다. 대게를 먹고 소개받은 민식 아저씨네 집으로 가는 길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주인아저씨가 갑자기 차를 돌렸던 것이다.
“아, 이런 거 그냥 보여주면 안 되는데, 손님이 멀리서 오신 것 같으니 인심 한 번 써야지.”
“여기는 우리밖에 모르는 곳이에요, 기막힌 야경 한 번 보고 갑시다.”
민식 아저씨가 거들었다.
차는 언덕 위로 빼곡히 들어선 집들을 헤집고 꽤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어디까지 가는 걸까 생각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멈췄다. 차에서 내린 나는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검은 바다 위로 예쁜 불빛들이 반짝이는 풍경을 보고 말았다. 거창한 것도 아닌데 그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바닷가 마을이 뿜어내는 밤의 불빛을 본 게 전부인데 갑자기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의 얼굴을 알아봤을 때 이만큼 감동적일까. 창피하니까 눈물이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이런 아름다운 걸 보려고 29년이 걸려 여기까지 왔구나, 이런 말도 안 되는 곳에 내가 있다니 감격스러웠다. 세상 끝에 겨우 한 발자국 어렵게 디디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두 발로 당당히 서서 내려다봐도 된다고, 너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