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살던 빌라는 이층이었다. 우리 집은 1층이었다. 2층에 다른 한 가구가 살고 그 위의 옥상을 공동으로 썼다. 이층짜리 건물로 들어오는 검정 철문도 공동으로 썼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오던 어느 날, 집으로 들어가는 검정 철문을 열려는 찰나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야!”
눈을 들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올려다보니 옥상에 쭈그려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아직 담배 피워도 될 나이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바닥에 침도 뱉었다.
미친 새끼.
속으로 말하고 무시해버리니 또 한 번 불렀다.
“야!”
부르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놀리는 것 같아 손이 부르르 떨렸다.
내가 저런 애들을 잘 알지. 우리 사촌 오빠가 저렇게 고등학교 때 담배 피우고 다니더니 결국 가출하고 외삼촌한테 뚜들겨 맞았잖아?
집에서 빈둥거리며 일요일을 보내던 어느 날, 해가 떨어질 때쯤 되자 엄마가 불판을 들고 동생이랑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옥상에 왜?
옥상에서 윗집 가족이랑 삼겹살 구워 먹기로 했어.
내키지 않았는데 무겁게 엉덩이를 뗐다. 옥상 위엔 이미 2층 식구가 모두 나와 있었는데, 2층 사는 아줌마 외에 또 아는 얼굴이 있어 흠칫 놀랐다.
아이고, 아름이 왔네. 아름아, 너 여기 오빠랑 언니랑 아직 인사 못했지? 니들 아름이랑 잘 놀아줘, 중학교 2학년이래. 아름이 귀엽지?
위층 아줌마는 열심히 말했지만 그 집 자식들은 듣는 척 마는 척 열심히 뭘 주워 먹고 있었다. 아줌마가 오빠라고 소개한, 옥상에서 나를 불렀던 그 양아치 같은 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끝까지 내 눈길을 피했다.
중간고사든 기말고사든 시험 마지막 날에는 무조건 남문에 가서 놀았다.
이층 사는 언니가 너 금요일에 시험 끝나면 너랑 놀아준데. 남문 같이 가준데.
나 같이 가자고 한 적 없는데?
같이 가준다는 데 그냥 가.
아, 나 같이 가기 싫은데? 그 언니 노는 언니 같단 말야. 싫어어어어. 엄마는 왜 그런 걸 마음대로 정하고 그래!!!
언니는 팬티가 보일락 말락 한 똥꼬 치마에 여차하면 가슴 쪽 단추가 터질 것 같은 딱 붙는 셔츠를 입고 날 기다렸다. 교복이었다 그건. 남문에 깔린 나일론으로 된 검은색 프라다 백팩을 메고 있었다.
남문 한복판에 있는 롯데리아에 데리고 가 햄버거를 사주며 누가 봐도 범생이 같은 나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머리는 왜 그렇게 짧게 잘랐어?
귀 밑 삼 센티니까여...
치마는 왜 그렇게 길게 입고 다녀?
무릎 보이면 안 되니까여...
다음 주 일요일에 아는 오빠들이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너도 나올래?
....친구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요...
그런 식.
그 후로도 언니는 이상하게 나를 잘 챙겼고, 내가 집에 혼자 있는 것 같으면 위층으로 올라오라고 몇 번씩 말했곤 했었다. 대부분 숙제한다고 거절했지만 어느 날은 비디오로 날 유혹했다.
아름아 너 영화 보는 거 되게 좋아한다며. 올라와. 비디오 빌려왔어. 과자도 사 왔으니 같이 보자.
하, 우리 엄만 왜 쓸데없는 걸 말하고 다닌데.....
아무 죄 없는 성일이까지 데리고 엉거주춤 2층 현관에 서 있으니 그 집 아들이 들어와,라고 말했다. 미친 새끼도 있었네.
불 꺼진 안방에 넷이 모여 앉아 언니가 기계의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텔레비전에 화면이 들어왔다. 그들이 빌려온 것은 ‘조용한 가족’이란 영화였고, 영화 시작 전, 호환 마마 같은 재앙이 무섭지? 불법을 저지르면 비행청소년이 된다, 그런데 이건 청소년 관람 불가야, 라며 엄포를 놓았다. 여기서 청소년이 아닌 사람은 한 명도 없는데.
내용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남녀의 베드신이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언니가 불안한 눈동자로 그녀의 오빠에게 물었다.
얘네들한테 이런 거 보여줘도 되나...?
뭐 어때 다 아는 걸 텐데.
나는 내가 불법을 저지르는 비행청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 자리가 너무 무섭고 긴장이 됐다. 내가 뭘 안다고 그래.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반면 동생은 뭘 알고는 보는 건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뚫어질 것 같았다.
그 집에서 이사하기 전 엄마는 위층 아줌마와 크게 싸웠다. 같은 식당에 면접을 봤는데 엄마는 되고 아줌마는 안 된 게 화근이었던 것 같은데 어른들의 일이라 나는 속사정을 잘 알 수는 없었다. 아줌마가 우리를 향해 걸쭉하게 욕을 쏟아내는 모습이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아줌마를 다시 만난 건 엄마가 돌아가셨던 해의 늦가을이었다. 뒤늦게 엄마의 소식을 어디서 어떻게 들었던 건지, 아빠의 회사로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찾아왔다. 입구에서부터 엉엉 통곡을 하면서 들어와 나갈 때까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라,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볼 때마다 ‘조용한 가족’을 보던 그 호환 마마보다 무서웠던 날이 떠오른다.
극혐 했던 윗집 오빠도, 한심해 보였던 윗집 언니도 그렇게까지 싫어할 일이었나 싶고,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지키라는 거 다 지키고 그렇게 범생이로 살아서 그들보다 뭐 얼마나 더 잘 살고 있는 건가 싶고. 인생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