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처음으로 날 찾는 전화를 건 남자는 PC통신 세이클럽에서 만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그 애의 전화가 너무 떨려서 세 번 중 한 번 정도밖에 못 받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엄마한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었다.
채팅창을 통해 보이는 아이디만을 가지고 어떤 애일까 상상하는 건 매일매일을 설레게 만들었다. 학교 축제 때는 친구들이 별자리 키홀더를 만들어 팔길래, 그의 별자리에 맞는 것을 사서 오래 들고 다녔다. 언젠가 건넬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하면서.
여자 중학교에서 여자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또래 이성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사람은 잘생긴 최부영 선생님이었다. 결혼도 했는데. 그때부터 영어가 좋았다.
키홀더를 들고 그를 기다린 건 영화관 앞에서였다. 드디어 우리는 실제로 만날 약속을 했고, 서로를 잘 알아볼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나는 단정한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다. 왜 그랬는지 단정하게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죄지은 것처럼. 연두색 니트로 짠 스웨터에 야구모자까지 썼다.
그 아이가 나타나 나에게 혹시 무슨 무슨 아이디?라고 물어보기까지 몇 번을 망설이는 걸 보았다. 제발 이 여자애가 아니기를 바라고 있는 표정과 몸짓을 내게 들켰다. 나는 그 애가 내 마음에 들었느냐 아니냐 이전에, 그가 내게 실망했다는 사실을 안 것 자체에 이미 마음이 상했다.
내가 말을 안 시켰던 건지 그가 내게 말을 안 거는 건지 우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영화 시작 전에도 끝난 후에도 우리는 쉽게 입을 떼지 않았다.
PC통신 안의 세상과 현실 세상은 너무 다른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 같았고 그 애도 다른 사람 같았다.
친구랑 영화 보고 밥도 먹고 들어간다고 엄마한테 얘기했는데, 그는 밥 먹자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천칭자리 키홀더를 뺄까 말까 계속 고민하던 사이 그가 그럼 잘 가,라고 말했다.
예상처럼 그는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고 세이클럽에서도 잘 볼 수 없었다. 나는 오래 그 키홀더를 계속 가지고 있었는데 그 키홀더는 그런데 진짜 예뻤다.
‘공동경비구역 JSA’ 영화는 내가 처음으로 남자와 단 둘이 본 영화다. 가상현실에서 실제로 옮겨진 나의 첫 데이트는 실패였지만, 나는 그 영화를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그 후에도 자주 봤다.
그 후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또 또래 이성 말고 남자 선생님한테 목맸다.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