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얘 봐라. 얘 웃네

by 피츠로이 Fitzroy


대학생 때 방학을 이용해서 회사 인턴을 지원했다. 어떻게 하면 더 열심히 살 수 있나 고민하는 청년이었다.
우리 학부 학생들이 취업할 수 있는 광고대행사 중 업계 1위 ㅈㅇ기획에서 뜻밖에도 출근하라고 연락이 왔다. 한 달짜리지만 기뻤다. 왜 나를?이라고 생각했던 궁금증은 출근 첫날 알았다.
-스펙은 그냥 그랬는데 연예인 000 닮아서 뽑아 본 거야.
날 면접했던 남자가 팀 모두에게 말했다. 기분이 더러워야 하는지 좋아야지 몰라서 그냥 웃었다. 그땐 잘 웃고 다녔다. 스펙도 그냥 그랬는데 잘하는 거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도 잘 웃는 거였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다던 여자 직원 한 분이 내게 A4용지 한 장을 팔랑 날리며 번역을 해오라 했다. 흰 종이 위에 있는 건 분명 내가 아는 영어인데 한 문장이 서너 줄이 넘어도 안 끝났다. 신문 사설 중 하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자기가 영어 더 잘하면서 왜 나보고 해오래 생각하며 종이를 끌어 앉고 끙끙 앓았다. 나의 실력을 알아챘는지 근무한 지 일주일이 지나자 나에겐 (영문 번역 외에도) 딱히 할 일을 주지 않았다. 나이 많은 윗사람들과 매일 점심에 청국장을 먹어주는 게 나의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아무튼 이땐 인간은 다 착하다는, 세상은 살아 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는 어떤 순수성이 있었는데, 그 생각이 처참히 짓밟힌 사건이 있었다.

입사 후 일주일이 안 됐을 때 팀 회식에 동석하게 됐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한낱 한 달짜리 인턴 따위 고급진 회식 자리에 끼워 준 게 감사하긴 하다.)
밥 먹고 와인 마시며 한참 즐거운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예전에 이 팀에서 함께 근무했다던 남자 직원 하나가 뒤늦게 합류했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하길래 내 옆의 누군가가 내 소개를 했고 그때도 역시나 나는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하고 있었다. 웃어야지 뭐. 밝게.
얼굴이 시뻘겋게 오른 취한 남자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라, 얘 봐라. 얘 웃네. 내가 한 번 박아줘야겠네.”
영원처럼 느껴지는 짧은 정적이 흘렀고, 누구 하나 나를 위로하거나 그를 타박하지 않는 것이 씨게 가슴을 때렸다. 그 자리의 나 말고 유일한 여자였던 영어 번역시킨 그도.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나와 레스토랑의 긴 복도에서 가만히 섰다. 음... 어떡하지. 아빠한테 전화해야겠다, 그 생각만이 들었다(엄마는 없으니까). 전화기 너머로 여보세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자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눈물이 쏟아졌다. 펑펑 울었다.

세상에 별로인 인간들은 많고, 세상은 거지 같은 일들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생각이 시작됐다.
지금이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뭐라는 거야, 개새끼가.’라고 되받아칠 용기는 없지만 적어도 울진 않을 것 같다.
최근 거의 5년 만에 팀 회식이란 것에 참석했는데, 친근감과 성적인 농담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대화를 들으니 옛 생각이 났다. 다만 나는 이제 성숙한 어른이니 혹여나 말로 매 맞고 있는 사회 초년생들을 지켜 줄 수 있음에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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