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림질하며 울었던 적 있으세요?
셔츠 다릴 때의 느낌이 묘하다. 하얀 셔츠는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교복 맞출 때 셔츠는 항상 두 벌.
자기 셔츠는 자기가 다려 입어야 한다며 아빠도 엄마도 유독 내게 셔츠 다리는 걸 고집하셨다. 남들은 엄마 아빠가 다려준 빳빳한 셔츠 입으며 등교하는데 왜 나는 내가 이렇게 힘들게 다리고, 다려도 결국은 조금은 구깃구깃한 셔츠를 입고 학교에 가야 하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컸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셔츠를 다리면서 철이 든 거 같다. 책임감이 생겼다고 할까.
지금도 나는 셔츠를 다리면 경건한 마음이 든다. 저절로. 신기하게도.
한 번에, 재빨리, 항상 같은 절차로, 그리고 반듯하게, 다려야 하는 것이다. 책임감을 가지고.
셔츠를 다리며 그 셔츠의 주인이 입었을 때의 반듯한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뭔가 잘 될 거란 주문을 외우게 된다. 학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한다든지 회사에서 인정을 받는다든지 면접에서 좋은 성과를 낸다든지. 내게 하얀 셔츠는 참 경건해지는 물건이다.
나는 교복 셔츠쯤은 내가 직접 다려 입었다며, 그걸로 뭔가 철이 든 거 같다며 뿌듯하게 말하는데 댄이 묻는다, 성일이는? 성일이도 혼자 다려 입었어?
내 동생... 그랬나?... 조금 생각을 해보니 성일이 셔츠도 내가 다려주었더라. 성일이 셔츠를 다리면서 나는 조금 슬펐던 거 같다.
엄마는 성일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셨다. 나는 그때 스무 살 대학생이었고, 스무 살이란 나이는 왠지 성인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고등학교 1학년은, 글쎄 나의 고등학교 1학년을 생각해보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애기였다.
동생이 엄마의 사랑을 덜 받고 자란 거 같아서 난 항상 그 부분이 제일 마음이 아프다. 동생이 가끔 어리숙하게 굴거나, 아직 혼자서 하는 부분이 부족해 보일 때 나는 오기로 더 과하게 동생을 챙긴다. 내가 녀석의 교복 셔츠를 다리며 얼마나 어금니를 꽉 물어야 했는지 알기나 할까.
아무튼 나는 다림질을 좋아한다. 한 번 다리려면 큰 마음먹어야 하고(너무나 귀찮다, 사실), 주름 하나 없이 빳빳하게 다려야 하는 하얀 셔츠 다리기를 너무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