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디테일이 없는 여자다.
어렸을 적, 내가 덜렁댄다는 것을 감지한 아버지는 바둑 학원을 끊어주셨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 한 것 같다.
사춘기를 겪으며 매우 침착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내가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게 큰 스트레스인지, 요즘 꿈에서까지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소릴 듣는다. 휴, 꿈꾸는 거 까지 디테일을 따져야겠나...
내가 가장 침착하고 조심스러워질 때는 삶은 계란의 껍질을 깔 때다. 하얗고 맨들 맨들한 삶은 계란의 겉면에 상처가 생기면 내 몸에 나는 상처보다 더 안타까워져서 견딜 수가 없다. 그때 나는 500% 집중하고 온 몸의 신경이란 신경이 모두 계란 표면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계란을 좋아한다.
계란 프라이, 계란말이, 계란찜, 계란 장조림, 물론 라면에 넣는 계란도 빼놓을 수 없다. 오늘은 계란 장조림을 하려고 계란 12개를 삶았다. 계란 장조림은 참 기분 좋은 반찬이다. 내가 이쁨 받는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어렸을 적 착한 일을 하면 맛있는 반찬을 해주는 엄마의 맛이랄까(사실 엄마는 계란 장조림 같은 거 해준 적도 없는데).
요즘 난 잠자는 것도 잊어버리며 어떤 일에 푹 빠져있다. 아직은 일 보단 구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래서 오늘 있었던 한국 본사에서의 교육 같은 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었다. 인사부에 있는 치아코상에게 어떻게 나를 어필할지 영어로 수십 번 외우지도 않았고, 낮에 잠깐 자는 단꿈에서까지 나타나, 지금 매장 어레인지가 안된다며 나에게 언질을 주는 상사도 그냥 무시해버렸고, 가족들과 함께 떠날 일본 여행은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내 휴가를 쓰겠다고 말할 참이다.
내가 꾸미고 있는 일에 비하면 위에 것들은 전혀 심각하지도 대수롭지도 않은 작은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 일로 너무 행복하고 삶이 신나니깐, 나를 어둡게 만드는 몇 가지 걱정들은 그냥 싹 무시할 테다.
그게 잘 되든, 잘 못 되든, 혹은 어쩌면 시작 조차 못 할지도 모르지만, 하루가 짧을 만큼 행복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으니, 그럼 된 거 같다!
계란을 까다가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실은 나도 잘할 수 있다. 나는 애초에 디테일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계란 12개를 하나의 상처 없이 깔 수 있다.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고, 너무 위축되어 있지 말고,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지.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 다 신경 쓰고 살지 말아야지 그 생각이다.
오늘은 계란 조릴 때 곤약도 넣어 같이 졸여야지! 아우 맛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