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마지막 날, 도쿄행 비행기에 극적으로 올라탔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두터운 점퍼 속 반팔티는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쿵쿵 뛰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비행기 출발시간 30분 전에야 공항에 도착했다. 화물 수속은 이미 끝난 지 오래였고, 심지어 비행기 출발 시간은 예상보다 30분이나 앞당겨져 있었다. 항공사 직원은 다음 비행기를 예약해야 한다 했고, 나는 망연자실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도무지 예상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손가락만이 간신히 항공사 대표번호를 찾아 꾸역꾸역 누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비행기기 연착되었으니 서두르라고. 항공사 직원의 한마디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빨리 수속을 밟으라 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새 없이 출국 수속을 시작했고, 최종 목적지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했다.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을 시간조차 없었다. 뛰는 내내 도대체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온 건지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이 물음은 여행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4박 5일의 여정이 어떠할지 미리 알았다면 괜찮았을까. 철저한 여행 준비는 좀 더 안정적인 여행을 보장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준비가 완벽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오고야 만다. 그토록 고대하던 화산 분화구(하코네 오와쿠다니)는 갑작스러운 강풍 탓에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어렵게 찾은 맛집은 때마침 쉬는 날이었다. 처음이라 서투른 데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처음이라 그럴 수 있다고, 낯선 이 곳에서 내 마음대로 될 거란 기대 자체가 오만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삼촌이 나 혼자 여행으로 첫 발걸음을 떼던 그 날에 큰 조카는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조카의 입학식 풍경이 카톡으로 날아들었다. 또래 친구 옆에서 꽃다발을 든 채 수줍게 웃는 조카의 미소가 눈에 든다. 어떤 어색함일지, 막연한 불안감 일지, 기분 좋은 설렘 일지 궁금해지는 얼굴이었다. 첫 생일을 한 달 남짓 남겨둔 막내 조카가 움직이는 모습도 카톡에 보였다. 어기적어기적 몇 발짝 걷다가 넘어져도 조카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포기를 모르는 조카의 머리에는 "걸어야 한다"는 슬로건 하나뿐이지 않을까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삼촌과 조카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첫 순간을 받아들였다. 첫 생일, 첫 입학 그리고 첫 여행까지.
어린 시절의 기억이 까마득하게 지워진 것 같은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걸음마를 배우던 때로 기억을 되돌리는 건 무리라 해도, 코흘리개 시절의 편린들을 누군가가 지우개로 쓱싹쓱싹 지우는 것만 같다. 깊이 숨어든 기억들을 애써 찾아보면 싹 다 지워진 건 아니었다. 유치원 재롱잔치 연습하다가 선생님께 혼나던 순간, 엄마 손 붙잡고 웅변학원에 가던 날, 방문학습지 선생님 피해 다니며 놀이터에서 밀린 숙제하던 풍경, 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친구들의 들뜬 마음과 책걸상을 뒤로 밀던 소리 정도가 떠오른다.
조카들도 나처럼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될 날이 오겠지. 멀고 아득하기만 한 먼 미래이지만, 그때에 꺼내어 볼 순간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 조카들이 꺼내어 볼 첫 순간들이 웃음 나고 행복한 기억이 되었으면 좋겠다. 더불어 어떤 첫 순간은 삼촌 덕분에 즐거웠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심도 부려본다.
# 야구장
야구장을 처음 오는 조카의 시선으로 담은 오늘의 경기. 결과는 8대 2, 엘지의 대승!
특급 호수비에 만루홈런까지 터지며 신명 나는 플레이와 흥겨운 응원이 이어지고. 한동안 신나게 외우고 부르던 엘지 응원가를 자신 있게 웅얼거리던 조카는. 오늘이 그에게 첫 응원, 첫 경기, 첫 야구가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즐거웠던 추억, 야구를 좋아하게 된 첫 순간이었다고 어디선가 말하지 않을까 혼자 맘대로 상상하고 뿌듯해하는 삼촌의 단상.
#엄마의 생일
누나들의 생일 케이크 앞에서 촛불 끄겠다고 볼에 잔뜩 힘 준 조카들은. 뒤뚱거리며 축하 노랠 부르더니 침 튀기며 신나게 후후 불을 끄고. 케이크도 자르겠다고 나서더니 달달한 맛에 미소 한 번 예쁘게 지어 보인다.
옆에서 예쁜 눈으로 그 모습 바라보는 아기 조카는. 태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엄마의 생일을 기억에 담진 못하겠지만. 볼에 바람 잔뜩 넣고 형들과 신나게 촛불 끄고픈 마음이 시작된 날이 있었다고. 오늘의 순간을 삼촌이 대신 기억해주겠다며. 호기롭게 후후.
#앙코르곡
"클로바"를 수백 번 외치는 조카의 몸부림에도 대답은 없고. 결국 삼촌의 한마디에 반응하는 인공지능 스피커를 허망하게 바라보는 조카는 다시 목에 힘을 주고. 그렇게 불러낸 클로바에게 작은조카는 "똥"노래를 내놓으라고 요청하고 씩 웃어 보인다.
정말 <똥>이란 제목의 노래가 흐르고. 몇 번의 앙코르를 받다가. 유사한 제목의 노래 메들리를 틀며 열일하던 주크박스의 그녀가.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조카들과 다시 만날 때에는 그 녀석들을 단번에 반갑게 맞아주기를.
더불어 어떤 첫 순간은 삼촌 덕분에 즐거웠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욕심도 부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