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기도 어려운 알파벳들이 조카의 입에서 우수수 쏟아지던 날이었다. 무슨 말인지 궁금해하는 삼촌에게 조카는 대답 대신 종이 한 장을 들어 보였다. 알쏭달쏭한 이름의 정체는 바로, 곧 다니게 될 어린이 태권도장이었다. 도복 입은 사촌 형을 부러워하며 제 나이를 손꼽던 조카였다. 멋진 도복을 입고 도장에 다니는 꿈을 꾸었을까. 그저 생각만 해도 두둥실 떠올랐을 조카의 마음이 보인다.
조카는 노란띠를 머리 위로 펼쳐 들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노란띠를 제 허리에 동여맨다.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갑자기 발차기를 선보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발차기는 거침없이 질주하더니 삼촌의 눈앞까지 이른다. 조카의 위협적인 발동작을 보고는 이러다 크게 맞겠다 싶어 삼촌은 조심스레 한 발짝 물러났다. 날이 갈수록 증가하는 조카의 전투력에 상시 대비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게 씩씩한 남자 조카를 둔 삼촌으로서의 마땅한 의무라 여기면서.
누나네 집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붙은 상장이 눈에 들어왔다. 기원에서 땄다는 급수 인증서였다. 이번엔 바둑이었다. 바둑을 배운다는 조카가 너무 신기해서 본인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았다. 네가 정말 바둑을 둘 줄 아냐고. 조카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당찬 표정으로 인증서를 들고 왔다. 그것도 잠시, 줄넘기를 잘해서 받은 상장을 보여주더니 이내 방 안에서 줄넘기를 꺼내 온다. 쌩쌩이 한 번 하는 것도 어려워하는 삼촌 앞에서 여유만만한 미소로 쌩쌩이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릴 적에 이것저것 참 많이도 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다. 미술학원, 웅변학원, 주산학원, 컴퓨터학원, 영어학원..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이 정도인데, 도대체거기서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처음 접하는 무언가에 대해 가졌던 그때의 호기심과 즐거움이 이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게 다가온다. 사촌 형처럼 멋진 도복을 입고 싶어 하던 조카의 꿈이 어릴 적 내게도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조카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바둑판을 들고 삼촌 앞에 섰다. 조카 대 삼촌, 삼촌 대 조카. 첫 대결은 그렇게 시작됐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바둑 대신 장기로 종목이 바뀌었고 결국, 삼촌은 그 대결을 받아들였다. 조카를 이기고 싶은 마음은 단 1퍼센트도 없었다. 삼촌은 그저 말 하나를 옮기는 동안 골똘히 생각하는 조카의 표정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고스톱
어느새 조카는 일곱 살이 되었고, 고스톱도 할 줄 모르는 삼촌을 가르치는 날에 이르렀다. 심지어 할아버지에게 몇 점 났는지 묻는 조카의 모습이 신기해서 넋 놓고 보다가.
# 장기왕
이번엔 장기를 두자는 조카. 오랜만에 두어 규칙이 가물가물한 삼촌에게 조카는 말 옮기는 법을 가르친다. 그렇게 시작된 일대일 대결. 하나둘씩 말을 잃고, 수세에 몰린 조카는 골똘히 생각하며 상황을 모면하려 애쓰지만 결국. 조카의 얼굴에는 실망한 표정이 역력하다.
조카를 이겨 먹는 못된 삼촌이 되고 말았지만. 어떤 문제가 잘 안 풀리더라도, 혹여 실패하더라도, 눈앞이 캄캄해지더라도, 지금처럼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기를. 그다음 한 발을 힘차게 내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삼촌이 무작정 이기려고만 한 건 아니라고. 훗날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삼촌의 마음을 조카는 이해해줄까 모르겠다.
#목소리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은 조카. 그 녀석에게 축하한다고 말하려고 걸었던 전화. 오늘따라 기운 없는 목소리가 내 귀에 닿는다. 조카는 더 놀고 싶은데, 어딜 가야 한다면서. "삼촌, 나 거기 가기 싫은데, 가야 된대. 휴."라고 말했다.
어딜 가기가 싫은 건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조카의 기운을 돋우려 얼른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선물은 다음번에 볼 때 전해 줄 테니 기대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나중에 보자고 하고 끊으려 하는데. 조카의 대답이 없었으나 아직 안 끊은 것 같았다.
"삼촌, 나 이만 끊을게"라고. 침묵 속에서 갑자기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대답을 듣다가 피식 웃음이 날 뻔했다. 그동안 알던 어린 조카가 아닌 것만 같아 미묘한 이 기분. 자기감정에 솔직해지고, 그걸 이제 자연스럽게 표현해내는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나는 그대로인 것만 같은데, 하루하루 몰라 보게 커가는 조카를 보며 실감하는 오늘, 지금 이 순간.
사촌 형처럼 멋진 도복을 입고 싶어 하던 조카의 꿈이 어릴 적 내게도 있었을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