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를 타고 새벽녘에야 도착한 하코네유모토역. 인적이 드문 거리에는 적막만이 흘렀다. 갑자기 어디선가 풍경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따라 걸음을 옮기니 한적한 주택가의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영화 <귀를 기울이면>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만화 같은 풍경에 넋을 잃고 멀뚱히 서 있었다. 또다시 풍경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사이 고양이 한 마리가 골목 어귀에 갑자기 나타나서는 눈앞에서 한참 동안 어슬렁거렸다. 열다섯의 여름, 나는 도쿄에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서른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그때 그 풍경이 이따금씩 떠올랐고, 마침내 다시 도쿄에 왔다.
등산열차, 케이블카, 유황냄새, 검은 계란 그리고 배낭 하나 메고 가족들과 걷던 순간도 함께 떠올랐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아빠가 가이드를 자처하며 호기롭게 떠난 여행이었다. "이키마쇼(行きましょう)"를 수없이 외치던 아빠 뒤를 졸졸 열심히도 따라다녔다. 국토대장정 버금가는 강행군의 일정이었다. 힘들었던 기억밖에 남은 게 없는 것 같지만, 하코네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었다. 다시 도쿄, 다시 하코네로. 그날의 기억과 지금 내가 보는 풍경이 똑같을 필요는 없었다. 추억으로만 떠올리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렜다.
하코네의 등산열차
이른 새벽부터 비바람이 부는 게 심상치 않았다. 결국 케이블카와 유람선 가동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오와쿠다니에 발도 못 디디고, 검은 계란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후지산은커녕 아시노코 호수도 눈에 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바로 어제, 놓칠 뻔한 비행기를 타고 온 경험은 이번에도 역시 큰 버팀목이 되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라고 <걱정 말아요 그대>를 흥얼거리면서. "아무리 애써도 끊어지는 인연이 있고, 생각지도 않게 이어지는 인연이 있다"라는 만화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말풍선을 그려보면서. 별일 아닌 듯 콧노래로, 혼잣말로 천재지변의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계획보다 일찍 이동하기로 했다. 다음 행선지는 도쿄 시내가 아닌 도쿄 외곽에 위치한 '가마쿠라'였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로 시작해서 원작인 요시다 아키미의 만화책까지 보고는 최애 이야기가 되었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가마쿠라에 가면 잔멸치덮밥(시라스동)을 꼭 먹고 오리라 마음먹었다. 그 결심 하나만으로 무작정 여행코스로 정한 곳이었다. 숙소는 후지사와역 근처에 있는 가정집이었고, 생애 첫 에어비앤비 숙소였다.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문 앞까지 나온 주인 할아버지는 외국인 손님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짐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집 내부를 둘러보는 사이, 케이크 한 조각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복숭아 홍차 한 잔을 내어주셨다. 달큰한 복숭아 향을 맡으니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예상치 못한 '웰컴'푸드와 '웰컴'드링크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을 나섰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코네의 케이블카와 유람선의 발도 묶어버린 바람은 가마쿠라에도 찾아왔다. 하지만 바람에 질 수 없었다. 가마쿠라에 온 이유가 잔멸치덮밥이었기 때문에 '분사쇼쿠도'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분사쇼쿠도'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스즈의 축구부 입단을 축하하며 부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던 곳이었고, 주인공 네 자매의 단골 식당이기도 했다. 가게 문을 지키는 고양이와 눈을 잠시 맞추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잔멸치 덮밥 하나를 주문했다. 식당 내부를 구석구석 찬찬히 둘러보는데, 영화 속 장면 그대로여서 반갑고 고마웠다. 잔멸치 덮밥이 나왔고, 수북이 쌓인 신선한 멸치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분사쇼쿠도>의 잔멸치 덮밥(시라스동)
밥심으로 든든하게 채우고,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이야기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거센 바람을 뚫고, 에노시마 벤텐교, 고쿠라쿠지역 승강장, 치카라모치야의 힘떡, 가마쿠라고코마에역의 철길, 고토쿠인 대불상의 빈 속까지. 어둑어둑해진 밤이 오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저녁을 먹었지만, 괜히 아쉬운 마음에 컵라면을 하나 사들고. 낮에 못 본 주인 할머니가 있었다. 컵라면에 넣을 뜨거운 물을 챙기고, 낮에 마신 복숭아 홍차를 또 내어주었다. 나는 포장해 온 치카라모찌(힘떡)를 꺼내 놓았다.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서로의 언어가 달라도 꽤 긴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저 귀 기울여 듣는 마음만으로도 즐거운 밤이었다.
이번 여행은 가만한 풍경소리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랬듯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고,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길로 나를 이끌었다. 뚜벅뚜벅 걷는 길 위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마쿠라의 목적은 잔멸치 덮밥이었지만, 주인공은 복숭아 홍차가 차지했다. 여행 내내 달큰한 복숭아 향이 생각났다. 노부부가 준비한 아침 식탁에서는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호텔 조식보다 더 예쁘고 정갈한 음식을 마주하니 뜻밖에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1박의 짧은 일정이었는데도, 마지막까지 따뜻하게 배웅해 주던 노부부의 친절한 응대를 잊을 수 없다. 나 홀로 여행자의 꽁꽁 언 마음이 사르르 녹았고, 놓칠 뻔한 비행기 트라우마는 온데간데없었다. 다음 행선지는 다시 신주쿠였다. 남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졌고, 도쿄 도심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언제나 그랬듯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고, 여행은 생각지도 못한 길로 이끌었다. 뚜벅뚜벅 걷는 길 위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