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둘, 도쿄 #3

추억을 안주 삼아 나 혼자 홀짝홀짝

by 나무늘보

내일 비가 온다는데, 오늘이 지나면 활짝 핀 벚꽃을 놓칠 것만 같아 조바심이 났다. 마침 근처에 있는 현충원에 만개한 벚꽃이 차고 넘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작정 동작역으로 향했다. 역에 내리면 금방일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서야 현충원 입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릴 적 언젠가 와 본 적 있을 법한 현충원은 낯설었고, 그 크기에 압도되었다. 드넓은 현충원 광장에는 벚나무가 가득했고,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벚꽃잎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머리 위로 해가 맑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봄이 있는, 윤동주 시인이 그리던 우물 안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추억처럼 흩날리는 벚꽃잎은 시간을 작년 이맘때로 돌렸다. 한국은 아직 때를 기다리는 벚꽃(이 아니고 매화였다..)이 도쿄 교엔공원에는 활짝 피어있었다. 분홍빛으로 물든 공원에는 봄소식에 들뜬 사람들로 북적였다. 벚나무(이 아니고 매화나무..) 아래에서 삼각대를 세워 놓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 아저씨,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아닌 매화..)을 바라보며 포즈를 취하는 부부, 신나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 그 옆에서 핸드폰을 들고 바지런히 사진 찍는 내가 있었다.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나오니 신이 나서 많이도 찍었다. 문득 풍경 말고 풍경 속의 나를 남기고 싶었다. 여행 내내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용기가 났다. 서른둘의 봄은 한 번 뿐이었고, 일찍 맞은 봄소식을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도쿄 교엔공원


사실은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을 보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원의 풍경을 내심 기대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비 오는 공원을 걷다가 쉼 없이 내리는 비를 피해 벤치에 앉아서 맥주 한 캔을 따고 싶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비에 젖은 초록의 풍경을 가만히 앉아 넋 놓고 보고 싶었다. 언제 비가 올지 몰라 숙소마저 공원 근처로 정한 나였다. 여행 중에는 아쉽게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영화처럼 비, 초콜릿, 맥주가 없어도 좋았다. 벚꽃과 더불어 따스한 햇살에 실린 봄기운을 들이마시며 걷는 순간은 더없이 행복했다.


분홍빛 봄 축제를 뒤로하고, 서둘러 오다이바로 향했다. 언젠가부터 여행을 가면 그곳에 있는 대관람차를 타곤 했다. 적당히 흔들거리는 관람차에 올라 한 바퀴를 도는 동안에 느긋하게 바라보는 그곳의 풍경이 좋았다. 도쿄에는 한 바퀴 도는 시간이 16분이나 되는 거대한 대관람차가 있었다. 도쿄 도심에서 오다이바는 꽤 먼 곳에 있었지만, 반드시 관람차를 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설레는 마음 안고 전철에 올랐다. 팔레트 타운에 들어섰는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닫힌 출입문 위에는 대관람차가 공사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망연자실한 채 빠져나와 한참을 걸었다. 아쉬운 마음에 슬쩍 뒤돌아보니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무지갯빛 대관람차가 거대하게 떠 있었다.



오다이바 팔레트 타운의 대관람차


멀리까지 나온 게 아쉬워 오다이바에서 멀지 않은 진보초에 들렀다. 헌책방 거리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시바시 다케후미가 쓴 <시바타 신의 마지막 수업>에 나오는 '이와나미 북센터'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다. 고령의 나이에도 매일같이 서점으로 출근하는 그의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고, 일본어 책을 읽을 순 없지만 그의 삶이 녹아있는 그 서점에 한 번은 들르고 싶었다. '이와나미 북센터'를 구글맵으로 검색하고, 한참을 찾아 헤맸으나 비슷한 간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목적지 근처에 어떤 전시관이 보여 들어가 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원에게 서점의 행방을 물었는데, 얼마 전에 문을 닫았단다. 또다시 망연자실한 채로 신바시 역을 걷고 또 걸었다.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술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배가 고파졌다.


점심에 가려다 대기줄이 길어서 못 간 규카츠 식당의 분점이 여기에 있었다. 저녁시간인데 생각보다 한산해서 빈자리에 바로 앉았다. 작은 불판에 규카츠를 하나씩 올려서 구워 먹었다. 열린 주방에 있는 주방장이 활짝 웃으면서 맛있는지 물어보았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맛있다고 바로 대답하니 그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솔직히 기대보단 아쉬웠지만, 주방장의 환한 미소와 엄지 척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점심에 먹은 햄버그 정식이 더 맛있었다. 무뚝뚝한 사장님이 건넨 메뉴판에서 고른 햄버그 정식은 예상과 달리 귀여운 모양을 하고 있었고 양도 푸짐했다. 기대와 달라서 좋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이 즐거웠다. 여행자의 신분이 주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않아도 사실 괜찮았다. 드넓은 교엔공원의 입구를 찾아 헤매던 와중에 만난 산책하던 아저씨는 친절한 안내와 더불어 당신의 아침으로 추정되는 샌드위치 반쪽을 나눠주었다. 샌드위치 반쪽을 한 입에 욱여넣으며 여행길 위에서 만난 풍경들이 생각났다. 지연된 비행기 출발시간, 캔맥주 한 모금, 목욕 후의 병우유, 복숭아 홍차의 달큰한 향, 봄축제가 한창인 공원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나면 금세 잊히는 게 아쉬워 조바심이 났다. 키치조지에 있는 티하우스에서 복숭아 홍차와 작은 찻잔을 샀다. 가격은 사악했으나 그 마음을 기억하고 또 기념하고 싶었다. 추억을 안주 삼아 나 혼자 홀짝홀짝 복숭아 홍차를 즐기는 낭만 하나쯤은 누려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추억을 안주 삼아 나 혼자
홀짝홀짝 복숭아 홍차를 즐기는
낭만 하나쯤은 누려도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글, 사진/ 나무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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