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다 말다 또 언제 내릴지 모르는 그런 날이었다. 빗물 가득 머금은 연잎의 초록이 무성한 전주의 덕진공원에서 나는 왜인지 애니메이션 영화 <언어의 정원>이 생각났다. 영화 배경지인 도쿄의 교엔 공원에서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붉은 매화가 참 예뻤던 초봄의 도쿄, 그리고 만개한 연꽃으로 가득하던 한 여름의 전주가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시 또 가볼 수 있을까. 아득한 꿈같은 그 날은 2018년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문 앞에 다다른 봄이 설렘으로 발을 동동 구르던 계절이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아니, 생각이라는 걸 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매우 이른 아침 비행기표를 끊은 것이다. 전철 첫차를 타고 가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심지어 당일에는 늑장 부리다 결국 탑승시간이 다 되어서야 입국장에 도착하고 말았다. 이미 수속은 마감되었고, 다음 비행기로 다시 예약해야 했다. 망연자실한 나는 캐리어를 끌고 터덜터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전의를 상실한 채 일단 앉을 곳을 찾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직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지연되었다고. 긴급 출국 수속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출국장은 왜이리도 먼지, 드넓은 인천 공항 안을 달리고 또 달렸다. 가까스로 비행기에 오른 나는 두툼한 코트를 입은 채로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긴급 출국 수속 대작전이 시작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공항을 벗어날 때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4박 5일의 여행이 사라질 뻔한 순간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기 때문이다. 급행열차 로만스카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왔고, 도착한 신주쿠역에서 곧장 하코네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신주쿠역에서 급하게 산 점심거리를 테이블에 펼쳐 놓았다. 유부초밥과 칼피스, 카츠 산도와 캔맥주. 첫끼를 눈앞에 두고서야 종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디단 한 모금의 맥주와 함께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츠 산도와 캔맥주
하코네유모토역은 한적했다. 도착하자마자 역 근처에 있는 생선가게를 찾았다. 연탄불에 직접 생선을 구워 먹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서 점찍어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시식시간이 끝났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놓칠 뻔한 비행기도 탄 마당에 이쯤이야 하는 넉넉한 마음이 생겼다. 운 좋게도 다음날 다시 찾은 가게에서 생선 두 점을 구워 먹웠다. 한편에 준비된 따끈한 국물도 꽤나 일품이었다. 무엇보다 생선구이 냄새 맡고 찾아온 귀여운 고양이들을 만나는 뜻밖의 행운을 잡았다. 기분 좋게 오늘의 메인 목적지인 료칸으로 향했다. 픽업버스 타고 료칸 입구에 당도하니 그제야 길었던 하루의 끝이 실감났다.
료칸에서 준비된 가이세키로 허기진 배를 채웠고, 부른 배를 퉁퉁 튕기며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노곤하게 긴장이 풀린 사이 갑자기 아주머니 한 분이 남탕에 들어왔다. 그녀는 목욕탕 곳곳을 돌아다니며 청소하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그녀가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엔 (매일 남탕과 여탕이 바뀌는 줄도 모르고) 여탕에 잘못 들어갔다가 식겁하고 돌아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난감한 내 마음을 모르는 아주머니는 그렇게 한참을 있다 나갔다. 장시간 입욕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이 되어 밖으로 나왔다. 욕탕 입구에 비치된 냉장고에서 병우유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나나우유가 떠올라 익숙하고 반가운 마음에 벌컥 들이켰다. 유카타를 입은 채로 카페테리아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바다 위를 날고, 선로 위를 달려 도착한 이 곳에서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노트에 끄적였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무엇이 좋았는지, 또 무엇이 다행이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 서른을 넘기고 나홀로 떠나는 첫 외국여행이었고, 첫 행선지는 도쿄여야 했다. 소원을 이룬 첫날이었고, 낯설고도 익숙한 시간이 유유히 흐르던 밤이었다.
나는 마음 가는 대로 노트에 끄적였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무엇이 좋았는지, 또 무엇이 다행이었는지 잊지 않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