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로그림 노운 Feb 07. 2023

고교생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란

존재 가치에 대한 고민



지금 지상의 외진 절벽에서는 나처럼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은 채, 삶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고통 속에서 멋지게 나는 연습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을지 몰라. 그에게는 내가 필요해. 사랑이란 내가 얻은 모든 능력과 지식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야.

-갈매기의 꿈 中



1998년 6월의 어느 날. 여느 날과 다름없이 간식 시간이 되었고, 나는 친구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연극부 선배들과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간식을 먹고 기분 좋게 독서대로 돌아갔다.


순간 뭔가 허전한 느낌.

바로 어제 일인데, 잊고 있었다.




웅성웅성,

독서대가 소란스러웠고,

다른 반 친구 하나가 학교 아래 아파트 옥상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이들은 공황 상태가 되었고, 충격적인 그 사건에 모두 황망해했다. 우는 아이도 있었고, 독서대 전체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최근에도 나는 그 아이와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밝게 사려고 노력하던 아이였는데, 도대체 왜?


그런 사실이 있고도 하루 만에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아무 생각 없었던 내가, 놀랍도록 더 충격이었다.


이토록 쉬이 잊히는 17년 세월이란 말인가.

안타까운 그녀를 기억하기 위해 나는 일기를 썼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7년 세월이 허망하지 않도록,

그녀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 정도?


하지만

나는, 우리들은,

그녀를 쉽게 잊었다.


나는 하루동안 충격에 휩싸였고,

다음날 이내 회복하였으며,

다시금 일상을 살아냈고,

금세 잊었던 것을 잠깐씩 떠올릴 때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왕따 문제도 있었다 하고,

학업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도 하고,

여러 추측들이 난무하였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고교시절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아이가 있을 때에도

그 아이가 없어지고 나서도

존재 가치에 대한 고민하는 날들을 보냈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누구나 15번을 찾는다.

고민할 거리가 있어 상담이 필요하면 25번을 찾지.

나는 뭘까

나는 여기서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나

학용품을 빌려주고,

시시콜콜한 잡담과 스몰토킹을 하는 존재?


유물 같이 보관해둔 과거의 쪽지들에는

대부분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워크맨 들고 간다 고마워

-유키 구라모토 CD 들고 감 Thx

-CDP 빌려간다, 열공

아, 나는 물건을 잘 빌려주던 존재였구나.


고등학생이 사고할 수 있는 수준은 단순했다.

그녀는, 그녀의 존재 가치를 고민하고 고민하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결론을 낸 것일까.


새파랗게 젊은 한 청춘이 사그라들었다.

아이를 특목고에 보내고 찰나의 기쁨 이후

이어지는 후회 속 그 아이의 엄마가,

앞으로 이어질 그녀 가족의 불행이,

이제야 그 무수한 절망이 눈에 보인다.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무쓸모의 존재 같아도,

그들의 가족에게는 존재 자체로 희망이 된다.

존재 자체가 축복이다.

잊어버린 그 이름을 일기장을 통해 다시 떠올렸다.


버텨내었더라면

여느 엄마와 다름없이

아이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며

티니핑 이야기나 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상의 소소함에 무료함을 느끼다가도

순간순간 살아있음에 감사할 날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급하고 무엇이 그리도 힘들어

삶을 포기하고 말았을까.


고인의 명복을 이제와 다시 빈다.



https://youtu.be/mjdC75YOXDE

Yuhki Kuramoto, <Reminiscence> 중 2. Romance 1998.3.1 발매
이전 03화 1998 만우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