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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뉴로그림 노운 Feb 02. 2023

1998 만우절

공개 고백과 연기



남녀 공학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한지도 어언 한 달이 지났다. 가끔 강당에서 탁구도 치고 테니스도 배우고 아침 운동도 하며 체력을 길러 나갔다. 학교에 갇힌 생활이 지겨울 때면 비밀통로를 통해 동네 마트 마실도 다녀오고, 어둠 속 숨은 공간에서 자그마한 일탈들을 하며 지냈다. 나름의 즐거움을 찾으며 모두들 학교에 적응했다.





당시 만우절 행사로 고백 타임이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전통인진 잘 모르겠다. 이전 해에 연극부 어느 선배가 당했다(?)고 들었고 다음 해에도 이어졌던 걸 보면 꽤 오랜 전통을 이어갔던 모양이다.


연극부 남자 선배 하나가 마음에 드는 후배 하나를 정해 대강당으로 부른 다음 고백을 한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가장 순진해 보였던 연극부 여학생을 골랐지 않았을까. 고백을 해서 차이면 ‘만우절이지’하면 되고, 성사되면 땡큐고.


이 깜짝쇼를 위해 꽤 많은 인원의 선배들이 강당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신학기 불편한 것은 없느냐, 혹시 마음에 든 남학생이 있었느냐, 친한 선배가 되고 싶으니 말해 보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좋게 말해) 순진(이고 아둔)했던 나는 관심 가는 사람이 몇 반 누구인데 그저 반짝이 같은 존재다, 호기심이 생겨 그저 관찰 중이다, 술술 불어버렸다.


청색 멜빵바지와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던 난 멜빵끈을 만지작거리며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어두웠고, 조금 추웠고, 이 학교에는 참 비어있는 공간들이 많네, 생각했다. 무슨 소리가 나도 문이 좀 열려 있나 보다, 바람 소리겠지 라는 선배의 말에 그런가 보다, 여겼다.


연기를 담당한 2학년 선배는 말을 참 잘했다. 어쩌고 저쩌고 연이어 내게 고백을 해버렸고, 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반짝이가 누구니 어쩌니 했는데 고백을 받기도 좀 그러잖는가!) 서프라이즈! 짓궂은 표정의 선배들이 강당 곳곳에서 후두두 튀어나왔다. 발 밑에서 숨죽이던 선배가 힘들었다며 불쑥 나타났고,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던 선배와 여러 연극부 선배님들을 필두로 놀란 나를 다독여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방송을 탔고

다행히 그 방송은 1학년 독서대에 들리지는 않았다.




다음 날의 쪽지와 가요 테이프.

-어제 잘못을 사죄하려는 뜻에서, 아니 우리 학교 전통을 이어받은 선택된 자가 된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주는 선물이니깐 부담 갖지 말고 어제 일 잊어버려라. 원래 먹을 거 사주는 건데 따로 나가기도 그렇고 해서. 네가 가요는 안 좋아한다고 하길래 한 번 좋아해 보라고 가요 TAPE를 준비했거든. 잘 듣고 모레 연극반에서 기분 좋게 만나면 좋겠다.


워크맨과 테이프의 시절이었다. 당시 음악은 내게 소중했고, 좋아하는 곡이 있으면 워크맨으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무한 반복해서 듣곤 했다. 사실 가요는, 공부할 때 가사가 들려서 안 좋아했던 건데. 어쨌든 고마웠다.


얼마 못 가 저 전통은 사라졌겠지만, (언제 사라졌을지 갑자기 궁금하다.) 당시 나는 마치 행인 1에서 갑자기 이 학교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혼자만의 착각에 빠졌다.


1달이 1년 같던 시절이었다.





https://youtu.be/0RGIIBLI3rI

쿨 <애상>. 1998.4.1 발매





3,4월은 고백으로 가득차서 도대체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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