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의 세계
학습연구년을 보내며 일 년의 가장 큰 관심사는 기초학력지도 학생을 만나는 일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도, 내 교직생활에도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학습연구년을 신청하였고 운이 좋게도 선발되었다. 학습연구년이 되면 소속 학교에 출근하지 않고 그해 연구년 주제인 기초학력 중 문해력 연구를 수행하면 되는데, 주된 일은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와 1:1 매칭을 하여 일주일에 3번 함께 문해력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날 오전에는 학습연구년 해당 선생님끼리 협의회가 있었고, 오후에는 대상 학생과의 첫 만남이 있었다. 협의회 때 우리는 문해력 강화 연수를 받으면서 짝꿍 선생님과 협동 시를 쓰는 과제를 수행하였다. 마침 짝꿍 샘도 아이와의 첫 수업이 있어 우리는 '누구냐 넌'이라는 시를 써나가면서 오후에 있을 올해의 '내' 아이와의 첫 대면을 그려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여 대상 학교를 찾아가 아이의 담당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대상 학생은 학급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착하고 무난하게 지내는 편이라고 전해 들었다. 보통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학습에 관한 관심이 적기 때문에 수업을 방해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일 가능성이 컸는데, 내가 맡은 지승이는 정말 고분고분하고 말에 토를 달지 않는 아이였다. 게다가 진단 검사를 해보는데 지승이는 학교와 주변 사람들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었다. 지승이는 앞뒤는 맞지 않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하였고, 같이 책을 읽거나 문제를 풀자고 해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른 학습연구년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벌써 수업하기 싫어한다고 고민이라고 어떤 유인책을 써야 하나 고민이라고 할 때도 지승이와의 수업을 생각하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1개월, 2개월, 반년 수업을 이어갔다. 기초학력 수업은 생각과는 다르게 발전이 눈에 띄게 보이지 않았다. 문해력을 키우기 위한 국어 수업은 수학 교과처럼 단계가 분명한 위계 교과가 아니라서 어느 부분은 잘해도 다른 부분은 부족할 수 있어서 정확히 어떤 부분을 교정해야 하는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중학생인 지승이는 여전히 글을 더듬더듬 읽으며 '샅샅이'와 같은 단어를 발음할 줄 몰랐지만, 여전히 우리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내 수업의 전부이고 내 유일한 학생과의 수업은, 지승이가 달력에 X 표시하는 만큼 쌓여 갔고 우리는 서로에게 적응하고 스며들었다.
지승이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평범한 가정이라고 안내를 받았는데 같이 수업을 해나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셔서 아빠와 함께 살고 있었고, 새엄마도 이제 막 생긴 참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삼촌네 집에서 살다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아빠와 새엄마와 살게 되었는데, 그 관계도 위태롭게 되었는지 어느 순간 삼촌네 집으로 다시 가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1학년 교실 옆의 학생회의실에서 수업하였는데, 지승이는 쉬는 시간에 갑자기 들어오는 선배나 창문 틈으로 무엇을 하는지 불쑥불쑥 들여다보는 동기들이 꽤나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그 사실을 담당 선생님께 말하니 선생님은 가림막 파티션을 가져다주셨고, 그것으로 입구를 가리고 수업을 하였다. 이집 저집을 전전하면서 먹은 눈치가 몸에 밴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다른 연구년 샘들과 함께 체험활동으로 타르트 만들기를 하려고 가는 도중 지승이는 "거기 가는 아이들 다 공부 못하죠?"라고 말했는데, 평소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지승이가 달력에 커다랗게 표시를 해놓은 아이의 생일날, 우리는 수업을 조금 일찍 끝내고 케이크를 사러 갔다. 케이크를 골라본 적이 없는지라 어떤 걸 골라야 하는지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는 지승이는 그저 가격이 싼 것을 골랐다. 점원에게 케이크 초를 14개 주라고 말하는 나를 보며 조용히, "선생님, 초는 나이 수만큼 받는 거예요?"라고 묻는 아이. 체험활동으로 함께 볼링장에 갔는데 학교에서 말고는 처음 가봤다고 하고, 카페에서 수업할 때도 음료수를 주문하는 것이 난생처음이라 신기하다는 아이. 근처 도서관 탐방하는 날도 책 검색대에서 끓여 먹는 라면 기계까지 신통방통하다는 아이.
아이의 경험이 아이의 세계를 넓히는 길임을 지승이를 통해 새삼 알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열려있고, 다른 사람의 생각도 얼마든지 습자지처럼 받아들일 것 같은, 눈치와 수용으로 달련 된 무채색의 지승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승이가 색채가 없기보다는 이것저것 다양하게 경험하고 부딪쳐보면서 자신의 의견도 주장하고 자신의 가치관도 확고히 만들어나가서 자신만의 알록달록한 색을 띠었으면 좋겠다.
지승아, 비록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네가 서서히 물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서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