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중환자실 포화, 어떻게 할까?

코로나로 드러난 현 의료체계의 민낯과 해결방안

by 닥터 온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동창에게 연락이 왔다. 필드에서 느끼는 현재 상황은 정말 어렵다고 한다. 중환자실이 포화 상태여서 중 환자들이 응급실에서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코로나 환자건, 젊은 심장마비 환자건 제대로 된 처치를 못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디서 비롯되는지 보고,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의사를 늘려야 한다고 한다. 의사가 될 수 있는 진입 장벽을 낮추고, 대학 입학 커트라인도 낮추고, 수준은 좀 떨어질지라도 감성이 풍부하고 환자를 위해서라면 적은 급료에 밤새서 치료를 할 수 있는 의사들이 의료계에 늘어나길 원한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현 의료체계는 이미 젊은 의사들(인턴, 레지던트)과 교수가 되기 위한 펠로우(우리끼리는 하도 노예처럼 일한다고 해서 펠 노예라고 부른다)들의 수명을 갈아서 운영되고 있다. 그 사람들은 그나마 전문의와 교수라는 지향점이라도 있어서 밤 세고, 밥 거르고, 의료 방사선에 피폭되면서도 의료행위를 아낌없이 펼치고 있다. 그런데 전문의가 되어도, 교수가 되어도 별다른 이득이 없다면 의료체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미래는 인권이 발달하는 방향으로 변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이 변화는 필연적 변화이다. 의료계는 그 변화가 늦어도 한참 늦지만 변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나의 동기이자 전 대한 전공의 회장 이선생이 인턴이 일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할 수 없도록 힘써서 법이 계정 된 지 이제 채 3년이 지나지 않았지만, 어쨌건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서 더 이상 의사들에게 사명감을 내세우면서 중환자를 돌보게 하는 것은 갈수록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당근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수가 개선이 필요할 것이다. 수가를 개선하려면 지금 운용되는 의료보험의 덩치가 커지거나, 혹은 사용처가 더 효율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의료보험을 더 걷는 것은 사실상 무리이므로(우리나라는 이미 직장인들의 유리지갑의 10퍼센트 정도를 의료보험으로 털어가고 있다) 제대로 된 의료수가 지급을 위해서는 사용처를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


어떠한 의료행위에 대해 '낭비'라고 지칭하는 것은 대단히 민감한 문제이다. 윤리와 사람 목숨이 달려있는 문제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이어져오던 관행들은 계속 유지되어올 수 있었고 지금 우리는 코로나라는 대 격변을 맞이하여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 논제에 대해 다시금 논의할 생각을 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에 반박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하지만, 나는 앞으로 기술될 부분에서 의료보험 지급에 있어 효율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일단 개선이 가장 쉬운 부분이 교통사고로 인한 보험 지급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일반인들도 '너무하다'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정도로, 보험이 커버해준다는 명목 하에 의료자원이 낭비되고 있다. 그나마 정형외과에서는 양반이지만 그 주관성이 극대화되는 한의학 영역에서는 교통사고 환자가 호텔급 병원에서 머무르며 의료행위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게 국민 의료보험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교통사고 후유증 환자가 이용하는 갖은 영역에서 자동차 보험뿐 아니라 의료보험 혜택이 이용되고 있다. 자동차 보험이 커버할 수 없는 부분 중에 일부분은 자기가 부담하지만, 일부분은 국민 의료보험이 쓰이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다면 의료보험 낭비를 근절할 수 있다.


이 경우 교통사고를 당해 실제로 의료보험의 혜택이 필요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판별하는 객관적 기준과 감시기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장기적 효과를 고려해 볼 때 이러한 법규와 감시장치를 다듬고 유지하는 비용이 낭비되는 비용에 비해 월등히 효율적임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다음으로는 외국인 보험지급 문제이다. 이 문제도 외국인 차별이라는 이슈와 맞물려서 너무 폐쇄주의적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주장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역 차별적인 관점에서 보험에 대한 지급은 하지 않았거나 매우 적은 외국인이 우리나라 보험의 혜택을 받고 곧바로 출국해 버린다는 것은 심각한 의료보험의 낭비가 아닐까 한다. 이 부분 역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만큼 곧 정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이자 내가 관심이 있는 분야의 문제이다. 바로 '죽어가는' 환자들에 대한 케어에 지출되는 국민 의료보험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원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 그것이 직계 가족의 의지이건 환자 본인의 의지이건 간에, 죽어가는 환자라도 어찌 되었건 대부분 치료를 받는다. 단 1퍼센트, 아니 그 이하의 가능성만 있어도 수술장 혹은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의료행위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료 문화는 매우 숭고하고, 그 가치를 돈으로 따지기 힘들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는 어떤가? 의료 행위하기 전에 돈부터 마련해서 오라고 한다. 때문의 미국의 의료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한국의 의료행위가 천국에 가깝다는 것을 모두 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천국의 의료행위가 종말을 고하는 데 까지는 얼마 멀지 않은 것 같다. 미국이라고 바보라서 국가적 의료보험을 시행하지 않는 것인가? 국가가 의료행위를 보험 화해서 보장하니까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는 의료보험이 계속 갈 것이라는 믿음은 실로 옳지 않다. 우리나라의 태어나는 인구는 계속 줄고 있고, 의료보험은 고갈될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숭고한 의료행위가 머지않아 All stop 되고, 미국처럼 갈 것임은 어찌 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우리가 조금 더 효율적으로 국가 보험을 운영해서, 다만 몇 년 혹은 몇십 년이라도 고갈을 늦추어서 많은 국민들이 혜택을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필요한 것은 불필요한 생명 유지 행위에 대한 근절,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신도 아니고 어떤 의료행위가 '불필요한' 생명 유지행위인지 명확히 알 도리가 없다. 따라서 환자의 자유의지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예로 뇌사 환자의 생명 유지 문제를 들 수 있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뇌사가 되는 경우(실로 대다수의 경우이다) 우리는 그 환자가 더 살기를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그냥 치료를 한다. 앞으로 이렇게 되어선 안된다. 모두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야 한다.


학교에서부터 죽음에 대해 가르치고 어떤 형태의 죽음을 맞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인이 되는 순간, 우리는 특정 상황에 놓였을 때 연명 치료하는 데 동의하는지 법적 효력이 있는 동의서를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 그 기초 지식이 있어야 한다.


뭐 그렇게 딱딱하고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냐고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은 현실이고, 미래 의료보험의 고갈은 기정사실이다.


이러한 생명유지에 대한 자유의지 반영 문화에 더불어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문화 역시 의료자원 고갈을 늦출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에 걸리더라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생명 연장을 하기 위해 강한 약으로 머리가 다 빠지고 피를 토할 때까지 항암을 하고, 몇 개월 생명을 연장한다. 그간 겪을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럴 때, 오직 마약성 진통제의 도움을 받으며 최소한의 침습 치료를 하면서 삶을 돌아보고 주변 지인들과 마무리하는 문화... 이런 문화가 도입된다면 어떨까?


나는 이렇게 될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되는 데 앞장설 것이다. 최대한 올바른 죽음의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미래 의료를 위해 연구하고 투자할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