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도 끝을 생각하다
2021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는 코로나 때문에 가족들도 보지 못하고 고통만 받으시면서 힘겹게 계시던 터라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장례식 내내 슬픈 기색 없이 친지들과 이야기하며 할머니를 추억하는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내 안에 내재되어있던 슬픔이 한 번에 터져 나오기에는 너무 커서 방어기제를 썼던지도 모르겠다. 나의 주 양육자, 나와 함께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사람의 죽음이었기에….
그리고 4개월 뒤에 꿈을 꾸었다. 꿈에서 모교 병원에 있는데 할머니가 변에 이상한 것이 나왔다고 해서 검사도 할 겸 입원을 했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하려고 차트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가 암이 복막까지 전이되어서 더 이상 해 드릴 것이 없다고 교수님들이 말씀하셨다. 그리고선 할머니가 나왔는데, 할머니는 갖은 수술을 하셨는지 몸이 상반신만 겨우 남은 상태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이지만 의식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의 남아있는 두 손을 잡고 응급실에서 울었다. 그리고 즐거웠다고, 즐거웠다고 연신 말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그 시간이 즐거웠다고….
세상 떠나갈 때 우리는 그 무엇도 가져가지 못하지만 즐거웠던 기억과 그것을 같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과의 마지막 시간, 그것만큼은 누리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와 나는 그런 시간이 없었다. 죽음은 때로는 이번 꿈처럼 급작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 꿈이 어쩌면 코로나로 인해 그때 못했던 작별인사를 대신하게 해 준 것은 아닐까?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것은 설사 혈육이 아닐지라도 매우 소중한 것이다. 또한 유년기의 시간이라 함은 그 밀도에 있어서 가장 짙기 때문에 그 시간을 함께한 기억은 가져갈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같은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은 아등바등 살아간다. 무엇인가 보이는 것을 쫓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 이 삶 자체를 누군가와 함께하는 기억, 그것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한다.
꿈 얘기가 나온 김에 하나 더 해보자. 또 다른 꿈에서 나는 오랜만에 병원에 찾아갔다. 반가운 얼굴들이 많았다. 그중 한 교수님과 함께 병원을 나서면서 교수님이 한 가지 질문을 하셨다. 자신은 생명을 다루는 흉부외과 의사인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했다. 말기 암 환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그 분야에서 나름 소신이 있었기에 나의 생각을 정리해서 말씀드렸다.
말기암 환자들은 모종의 희망을 가지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과정 또한 매우 고통스러운 항암치료 같은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혹시 낫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권유해 드렸다.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감각과 감정을 체험한다. 그런데 말기암 환자의 경우 남은 시간의 대부분 동안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그런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면 고통이 더 늘어날 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런 고통스러운 치료를 행하는 것보다 이 세상에 머무르는 동안 조금이라도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최소한의 치료를 하면서 삶을 잘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다. 여기서 최소한의 치료라 함은 말기암에 투여가 허용되는 마약성 진통제 등을 통한 고통 경감 치료이다.
이러한 말기 암 환자를 통한 태도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너머에 또 다른 어떤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우리의 삶 너머에 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닌 거쳐가야 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까지 시간을 어떻게든 늘리기보다 남은 시간을 추억하며 새로운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말씀을 드린 이후 그 교수님의 반응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드문드문 나는 것이 꿈의 묘미가 아닐까? 어쨌든 나는 이 꿈을 통해 나의 꿈인 호스피스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