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수능, 순응
고3의 꽃은 수능과 대입이다. 하지만 그전에 수시라는 제도가 있으니. 전편에도 잠깐 말했듯, 나는 수시에 지원을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모두 떨어졌다. 수시 1차에서 연세대 공대에 내신 우수 전형으로 지원했다가 떨어졌고, 수시 2차에서 서울대에 마찬가지로 내신 전형으로 지원했다가 1.2 배수 서류 전형까지 합격했으나 마지막 면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면접에서 탈락했다고는 하나 내신까지 합산해서 카운트하는 것이기 때문에, 1학년 때 내신과 마지막 내신이 좋지 않았던 것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탈락뿐이었던 수시 또한 나에게 긍정적 작용을 한 것이 있으니. 바로 서울대 전형에 서류 합격한 상태에서 수능을 볼 수 있었던 점이다. 덕분에 수능 못 봐도 그냥 수시 붙겠지 라는 생각으로 수능을 더 맘 편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수능을 마음 편히 본다는 것, 그것은 정말 정말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수능을 봐 본 사람이라면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수능을 맘 편히 보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중 하나가 모의고사를 수능처럼 보기. 나는 고3에 시행하는 모든 모의고사를 수능이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연구하면서 봤다. 이 시간에는 이런 점이 필요하구나, 가령 이쯤 되면 피곤하니까 이 교시에는 끝나고 꼭 자야 하구나. 언어가 끝나면 배고프니 간식을 꼭 챙겨야 하는구나 같은 생활 팁부터, 이 시간 수리 영역 27번 문항에는 어려운 것이 나와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으니 일단 넘기고 다 푼다음에 다시 와서 풀어야겠다 와 같은 기술적인 부분까지 연구해서 모의고사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모의고사날 만큼은 한 점의 불편함도 없이 오직 시험만을 위해 존재하는 몸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앞사람이 다리 떠는 것, 불필요한 소음차단이 필요했기에 가리개와 귀마개가 필수였고, 몸이 불편하거나 배고프거나 춥거나 아프면 집중력이 흐트러지기에 담요, 상비약, 초콜릿 등이 필수였다. 그래서 수능이 가까워질 때쯤에는 거의 문제지를 받는 순간부터 기계적으로 풀이에 임할 수 있는 수능 맞춤형 인간이 되어갔다.
지금생각하면 시험이라는 행위 자체가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임했던 것 같다. 실제로 나는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나가는 자신을 보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하였는데, 그것은 문항의 난이도와 상관없이 그저 내가 문제를 수월하게 풀 수 있는 컨디션과 주변 상황을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난이도가 너무 어렵다 싶은 친구들은 그저 넘기면 되었고 나는 내 실력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최대의 점수를 얻으면 그만이었다.
욕심은 내지 않았다. 어차피 나의 실력이 완벽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한 번도 모의고사에서 외국어 영역을 제외하고는 만 점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나의 완성도가 100퍼센트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맞출 수 있는 문제들만 잘 맞히고 그것을 실수 없이 기입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흔히 발생하는 문제들이 잘 풀어놓고 마킹을 잘못하거나, 시간이 모자라서 마킹을 못하거나, 뒤의 문제를 보지조차 못하고 풀지 못하는 문제들인데, 이런 노력을 통해 그런 어이없는 경우들을 미연에 방지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수능 보는 기계가 된 나는 수능 당일 잭팟을 터뜨린다. 나의 실력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게 된 것. 말도 안 되는 결과였다. 지금껏 봐 왔던 모의고사 중 가장 좋은 급의 성적을 얻었다.
수능 보던 날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는 마치 재수생인 것처럼 거침없이 시험에 임했다. 복장부터 교복이 아닌 사복차림. 그리고 시험 보는 동안은 친구들과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서였다. 어차피 틀린 문제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친구와 답을 미리 맞혀보는 행위 따위는 의미 없고 시간 낭비고 멘탈을 흔들리게 할 가능성만 있는 것이다.
점심은 환기도 할 겸 친구들과 나가서 도시락을 먹었다. 배탈 안 나게 적당히 먹고 친구들과 그냥 잡담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머지 점심시간은 잤다. 그리고 상쾌하게 외국어와 과탐영역을 끝내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노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수능 날짜가 다가올수록 긴장이 되기 마련. 그래서 나는 평소 쓰던 스터디 코멘트북을 수능 날짜에 맞춰서 쓰며 마인드컨트롤을 계속했다. 그중 가장 좋았던 것이 자기 확언. 나는 된다. 할 수 있다. 같은 류의 말이 스터디 코멘트북에는 빼곡히 적혀있다. 그 말은 나를 향한 응원이었으나, 정신과 의사가 된 지금 돌아보니, 나 자신의 강렬한 무의식의 인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수능을 본 뒤에도 스펙타클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기다리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