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론의 허점과 이에 대한 해법
앞서도 밝혔듯 운명론은 내가 믿는 이론이다. 남녀 간 운명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처음과 끝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면) 다 정해져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이론은 사뭇 위험한 이론이다. 왜 위험까지 한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예시를 생각해 보자.
정신과 의사를 하다 보면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된다. 운명론을 적용한다면 의사는 병으로 모든 것을 잃은 환자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또한 다 운명이겠지요'
이 말을 들은 환자는 얼마나 황당하고 화가 날 것인가?
그러기에 나는 항상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다. 힘들어하는 환자들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싶어도 애초에 그런 상황이 전혀 아닌 환자들 또한 많았던 것이다. 그 쉬운 운동을 할 시간도, 산책을 할 기력도 없는 환자들이 허다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복해져야 하는가? 과연 그들은 그저 불행할 운명인가? 더 나아가서 제3세계의 기아들은 행복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기회조차 박탈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운명론을 믿는 나에게 이 문제는 참 어려운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여러 철학 관련 책과 글도 읽어보고 다른 사람들과 의견도 나누어 보았다. 그러던 도중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마다 각각의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진리를 접하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 놓인 사람이 진리와 이에 따른 행복의 그림자를 쫓기 어려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는 제3세계에서 태어난 아이가 워런 버핏과 같은 부를 축적하는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0에서 1을 이루는 것과 9999에서 10000을 이루는 것의 차이는 어떨까? 이에 관해 성경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성경에서 한 가난한 사람이 자신이 가진 재물을 헌금하였을 때 예수는 그것의 의미에 관해 피력한다. 그가 헌금한 것이 비록 적을지라도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렸기에 부자가 낸 헌금보다 값지다고 말이다. 이것이 '가난해도 헌금해라'라는 단순한 해석이 아닌 삶의 진리의 한 부분을 보여 준다.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노력해도 소명을 다 한 것이다.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업적으로 나아감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쉽다. 처지가 어려운 사람이 그 어려운 처지를 뚫어낸다면 오히려 해탈로 나아가기 쉽다는 뜻이다. 반면 태어날 때부터 부유하고 평탄한 사람은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기 때문에 오히려 깨달음을 얻기 어려울 수 있다. 기독교식 표현으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감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감보다 어려운 것과 같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자면, 어려운 삶에 처해진 이에게 너무 노력하는 것을 종용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물질적으로 행복해지고 풍요로워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삶의 진리는 역시 물질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쪽에 있기에, 물리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도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의 그것보다 더 쉽게.
이런 생각에 대해 뭇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가난한 사람에게 그저 현실에 안주하고 정신 수양이나 하라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과거 노자 사상에 대한 견해가 그러했다. 노자 사상에서도 이런 대목이 있다.
정치란 무릇 백성의 지배욕과 소유욕, 명예욕을 없애는 것이다. 하나 먹고사는 데는 굶주림이 없이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다. - 도덕경 3장, 불상현 사민부쟁
나는 이 또한 진리에 근접해 있는 의견임을 알면서도 처음 도덕경을 읽을 당시 나는 백성에게 욕심을 없애라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었다. 하지만 깊은 고찰로 인해 알게 되었다. 가진 것이 적고, 욕심이 없을수록 깨달음에 가까워지기가 쉬워진다. 물론 당연하게도 배고픔과 고통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만족될 때 우리는 욕심을 더 부려서는 안 된다. 진리에서 멀어진다.
독자님들 중에서 물질적으로 이룬 것이 많거나, 혹은 처음부터 축복받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그것은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수련하고 이루어야 할 것이 많음을 의미할 수 있겠다. 이는 나에게도 역시 적용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요약해 보자면 이것이다.
적게 가졌다면, 적게 이루어도 되지 않을까?
많이 가졌다면, 많이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복된 삶이 죽어서도 복된 삶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방심하지 말 것, 늘 깨어있을 것, 그리고 모두가 먹고살 만큼은 환경이 되어 정신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환경이 되도록 노력하고 베푸는 삶을 살 것.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