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존재하고 소중한 이유.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현재 나의 답은 'Yes'이다. 이 대답을 도출해 내기까지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했다.
우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이 세계, 삼라만상을 인간이라는 상대적으로 낮은 차원의 관찰자가 이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감각적 개념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보다 한 차원 높은 사차원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공간에 합쳐서 볼 것이다.
실제로 시간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차원이라는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부터 정립되어 와서 현재에는 많이 증명되어 온 이론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조금 이과적인 설명이 필요한데, 그것에 관심이 있다면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넘어가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차원에 불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위에서 떨어지는 사과가 있다고 하자. 인간은 3차원적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10m, 9m, 8m… 그리고 땅에 떨어지는 사과를 본다. 하지만 4차원 또는 더 높은 차원의 존재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합했기 때문에 그 사과가 마치 인간 표현으로 하자면 길게 이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때문에 그런 존재가 있다면, 어느 시점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사과의 앞면, 뒷면을 볼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런 존재는 과거와 미래도 손바닥 보듯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정해져 있다. 미래라는 개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완성되어 있다. 고차원적 존재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미래란 이미 정해진 물체와 같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마치 우리가 보기에 손바닥 앞뒷면이 있듯이 미래도 그렇게 정해져 있다.
이렇게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인간의 몸은 3차원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한 차원 높은 시간을 한 번에 응축해서 인식할 수 없다. 결국 시간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존재하는 개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에 따라 나누어서 물질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공간 축뿐 아니라 시간축으로 여행하고 있는 우리... 우리 삶은 우리의 인지에 비해 길기에 우리는 삶이 하나의 여정이라고 인식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아주 기나긴 여행 하고 있는 것. 그 끝은 알 수 없지만 이미 정해져 있다. 내일이 될 수 있고, 수십 년 뒤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이 삶이란 여정도 끝이 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이라는 여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고부터 어느 자리에 앉을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인생이라는 여정을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도 잠시, 바깥의 풍경을 보고 여행을 오롯이 즐기기보다는 어느 자리가 경치가 좋은지, 어떤 자리가 편한 일등석인지 줄을 세우고 경쟁한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앉아 얼마 가지 않아 곧 인생이란 여행의 종착역에 다다랐음을 깨닫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우리네 삶은 결국 물질계 나들이와 다를 바 없기에 어느 자리에 앉아서 갈지 고민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잘 맞는 자리를 찾아 여행 자체를 즐겨야 한다. 그때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보고 듣고 느껴야 한다.
물론 여행 후반부 대비하는 것 중요하지만 사실 우리는 여행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다. 더구나 여행이 끝나고 어떤 여정이 또 기다리고 있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내 생각이 맞다면 오히려 우리는 여행 후반부를 도모하는 것보다 삶이란 여행이 끝나고를 준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여정을 후회 없이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지. 똑같은 삶은 두 번 주어지지 않는다. 이번 생에 어느 자리에 앉아 갈지 너무 고민하지 말고 현재를 즐겨야 한다.
이렇게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 생기는 의문이 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시되는가? 자유의지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뇌 안에서 일어나는 물질들의 상호작용 아닌가? 우리가 느끼기에 그것은 자유의지지만 사실은 뉴런 안에 있는 신경전달물질들이 과학적 원리에 따라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우리는 작은 화학작용들에 있어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이 분자와 이 분자가 만나면 이렇게 되겠지 하고. 마치 앞에서 다룬 사과가 떨어지는 과정에서 조금 후의 결과를 예측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 자유의지를 예측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복잡한 분자들의 이동이 복합적으로 섞여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그런 기술은 개발되지 않았다. 훗날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것과 별개로 자유의지는 중요하다. 그것은 인간의 ‘기분’과도 관련이 있다. 혹은 마음가짐이려나? 어떠한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해도 우리가 그것을 좋은 기분으로 가는지 혹은 마지못해 끌려가는지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길을 걸을 때 좋은 기분으로 가기 위해서는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자기가 10억을 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은 행복할까? 행복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정작 10억을 벌게 된 순간의 그는 그 10억을 더 불리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이제 이 10억으로 어떻게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지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 보이는 모습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마음가짐이 다르기 때문에 그 둘은 정말 다르다. 우리가 이러한 마음가짐을 잘 다잡기 위해서는 마음에 대한 수련이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똑같은 일을 겪더라도 그 순간을 온전히 즐길 수 도 있고, 혹은 다른 생각에 빠져 불안해하거나 고민하면서 겪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HERE and NOW, 즉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명상이나 요가 등 마음가짐을 수련하는 것이 유효할 것이다.
면담을 하다 보면 이런 얘기를 하는 내담자들이 있다.
<그때는 제가 마치 제가 아닌 것 같았어요. 몸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죠.>
이런 대사는 비단 정신병적 증상뿐 아니라, 약물에 대한 반응으로도 나오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신병이건 정신과적 약물이건 작용하는 메커니즘이 신경전달물질에 작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신과적 증상들과 약물에 의해 조절되는 우리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한낱 신경전달물질의 향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우리가 파란 약을 먹는다면 빨간 약에서 비롯된 행동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자유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내가 하고자 하면 할 수 있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러한 모순은 자유의지도 우리의 인식이 만들어 낸 시간이라는 개념과 같은 존재로 생각할 때 비로소 풀린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느낌으로써 존재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자유의지로 대변되는 '나'라는 개념도 실제적으로는 우주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지금껏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나'라는 주인공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의식의 지평은 더 넓어질 것이다. 실로 모순된 말이지만 그럼에도 결론을 말하자면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있는 것있냥 착각한다고 할 것이다. 결국 운명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자유의지는 우리에게 있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