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철학, 인생관이 필요한 이유
삶이란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의문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질문일 뿐이다. 하지만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이가 소수이기에, 이 삶이 무엇이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라도 느끼고 알고 살아가는 이들은 그만큼 삶의 정수를 만끽하며 살 수 있다.
삶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부분은 이렇게 답한다. 그런 생각할 시간 없다. 알아서 뭐 하냐. 삶이 뭐긴 그냥 부모가 낳았으니까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한다. 그저 당연해 보이는 답변들이다.
이들에게 삶이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닌, 그저 주어진 것이다. 곧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삶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재미있으려고”다.
이 삶으로 나아가기 전, 우리는 일부가 아닌 전부였다.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전부였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좀 더 들어보라. 하얀 벽지가 있다고 해보자. 거기서 까만 점 하나가 생겼다. 그 까만 점이 있던 자리는 원래 하얀 벽지이자 전부였다. 그러다 까만 점이 생겨서 하얀 벽지로부터 구분되기 시작했다. 전체로부터 독립해서 까만 점이 된 것이다. 조야한 비유지만 이렇게 하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전부'였다는 사실이 조금은 와닿을 것이다.
전체로부터 독립하여, 하나의 개체로 나온 우리는 조금씩 세상을 객체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처음 아기 때는 그게 어렵다. 내가 세상이고 세상이 나다. 아직 독립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얀 벽지와 까만 점처럼 처음부터 도드라진 구분이 되는 것이 아니고 마치 밀가루 반죽에서 하나의 형상이 튀어나오듯 그렇게 서서히 구분되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을 객체로 인식하게 된 우리는 재미를 얻기 시작한다. 재미란 단어도 뭉뚱그려 쓴 거지만 이 재미에 해당하는 것이 참 많다. 타인이 있어 타인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재물이 있어 그걸 뺏어 올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성취감을 이룰 수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재미다. 내가 세상 전부일 때는 느낄 수 없다가 세상의 일부가 되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외부 자극들인 것이다. 그렇게 외부 자극이 있고, 그 반대에 해당하는 자극들을 느끼며 우리는 희로애락을 느낀다. 그냥 그게 재밌으니까. 그걸 느끼러 이 세상에 온 거니까.
근데 이런 자극들은 한쪽이 있으면 반대쪽이 있다. 무언가를 얻는 성취가 있으면 그걸 언젠가는, 결국에는 죽음을 통해서라도 잃어야 한다. 돈을 얻으면 쓰고, 누군가에 마음에 들었다가 다시 방출되기도 한다. 이런 인생의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겪다가 우리는 마침내 세상과 다시 통합을 시작하게 된다. 더 이상 구분됨으로써 재미를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충분히 느꼈고, 그 모든 것이 헛됨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노인이 되면 자연스레 인지능력이 저하되고, 구분함을 어려워한다. 그저 물 흐르듯이 가다가 결국 재가 되어 세상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삶이란 이런 것이기에,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개인으로 구분되었기에 우리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 무엇을 얼마나 경험하고 갈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이번 생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꼭 과도한 외부자극과 인생의 오르막길 내리막길을 가파르게 겪어보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무엇이든,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다. 바로 내가 그걸 경험하기를 바라고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음속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내가 이번 생에 진정으로 경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것을 경험할 것이니까.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인생에 있어서 내가 원하는 경험을 찾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나는 이과생이다. 이과생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의대에 진학했고, 거기서 정말 많은 이과스러운 것들을 배웠다. 생리학, 생화학, 생물학 등등... 그뿐인가? 정신과를 전공하고 나서는 뇌에서 일어나는 각종 화학 작용과, 신경전달물질... 뭐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배웠다. 이 약은 도파민을 떨어뜨리고, 저 약은 세로토닌을 올리고... 그렇게 수많은 이과적 팩트로 무장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가 되었다. 그리고 환자를 치료한다. 그런데 막상 필드에 나와보니 이과적 지식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그 이상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었다. 진료라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일이기 때문에, 과학적 지식뿐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이 필요했다. 가령 이런 경우다.
의학적으로 보면, 이 환자에게는 이 약물을 주면 생명이 연장된다. 근데, 이 환자는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약물이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며, 얼마간 연장이 되어도 그동안 고통에 시달리다 죽어갈 것이다. 더군다나 환자와 보호자는 이제 그만 고통에 시달리고 싶어 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약물을 주면 어느 정도 생명이 연장되고, 안 주면 어떻게 되는지는 의사로서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사결정에 그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만의 뚜렷한 인생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꼭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거창한 일뿐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은 선택이기 때문에, 나는 진료의 순간순간 꽤 자주 선택해야 할 순간이 왔다. 나의 치료적 결정이 환자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인데, 그 답은 교과서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소위 그런 책들이었다. 중, 고등학교 필독서. 나는 이 책들을 입시를 준비하면서 이미 접했다. 하지만 중요 지문만 잠깐 읽고 수박 겉핥기식으로 한 것이 다였다. 수학, 과학 공부하기도 바쁜데 언제 책 한 권을 다 읽어? 거기다 이 책들은 이름부터가 읽기 싫게 만들고, 그 두께에서부터 펼칠 엄두가 나지 않게 생긴 것이었다. 파우스트,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군주론 등과 같은 책을 보라. 나는 그 책을 읽지 않았었다.
그런데 삶에 대한 해답은 그 안에 있었다. 내가 고민한 대다수의 문제들은 이미 현명한 누군가가 나보다 더 오랜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 있는 문제였다. 그래서 나는 필요에 따라 그런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던 노자는 깊이가 있었고,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지식은 삶을 사는데 당장 쓸모가 있는 도구다. 우리의 삶을 거친 바다를 해쳐나가는 항해에 비유한다면 지식은 노, 돛대, 항해술과 같은 것이다. 반면 삶에 대한 철학은 나침반과 지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리 좋은 기술과 항해술이 있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면, 당장 연명은 되겠으나 장기적으로 볼 때 항해는 실패한다. 그래서 인생관과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꼭 의학에만 철학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것은 지식의 발달이 맞다. 허나 이러한 지식들은 위험하거나, 환경을 오염시킬 가능성 또한 다분하다. 반도체 개발 과정에서 필요한 수많은 물, 원자력 발전 같은 예 말이다. 따라서 모든 이과생들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하기 위해서라도 인생관과 철학을 생각해야 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 속력이 아니라 속도다. 즉, 벡터값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디로 나아가는지 보며 나아가는 당신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