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장고 : 분노의 추적자>와 반격
*느빌의 책방에서는 "디스토피아"라는 키워드에 이어 "반격"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반격" 3부작 중 세 번째 텍스트입니다.
‘반격’을 키워드로 이번에 다루는 작품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장고 : 분노의 추적자>이다. 일전에 다루었던 두 작품 <서른의 반격>과 <바보들의 결탁>에서 신명 나는 복수를 기대했지만, 고구마만 잔뜩 먹은 기분이었을 이들에게 사이다 역할을 톡톡히 할 이 영화는, 주인공이 흑인 노예인만큼 이따금 답답하거나 화가 나는 상황이 펼쳐지더라도 얼른 농담조로 그 전부를 쏴버리는, 아주 시원한 영화이다. <서른의 반격>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이고 <바보들의 결탁>이 ‘(실패하는) 달걀 세우기’였다면,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총알이 된 계란’이거나 ‘계란이고 뭐고 다 폭파시켜버렷’이라 할 수 있겠다. 3시간에 가까운 긴 러닝타임이 도리어 짧게 느껴질 만큼, 키치한 속도감과 먼치킨에 가까운 주인공의 사격 능력이 내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고(Django)>(1966)를 오마주한 이 영화는 ‘죽은 아내의 복수’라는 원작의 스토리를 살짝 가져와 2012년에 제작되었다. 아내를 구하기 위해 불길로 뛰어드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말하자면 오직 사랑이기 위해 고투하는 한 노예의 해방기이다.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줄거리 및 정보는 아래 링크 참조
<장고 : 분노의 추적자>를 얘기하는 데 있어 ‘장르’를 빼놓을 순 없겠다. 타란티노 감독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백인 남성의 전유물로 이해되는 서부극을 거의 그대로 쫓아가는 이 영화는, 흑인 노예가 주인공이 되어 기존 서부극이 숱하게 (그리고 게으르게) 반복했던 주제의식을 거꾸로 되돌려 가격한다. 스파게티 웨스턴과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를 결합한 셈이다.
*스파게티 웨스턴 :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로 공식화된 미국의 정통 서부극과 달리, 조연은 물론 주인공조차 악당에 가까워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물들을 그린 장르.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 : 1970년대 미국에서 흑인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흑인 배우를 주연으로 해서 만든 다분히 상업적인 의도의 영화로, 범죄와 액션물들이 주류를 이루는 ‘익스플로이테이션’(착취) 필름의 일종.
몇몇 블랙스플로이테이션 무비의 경우, 단순히 흑인을 얼굴 마담 격으로 내세울 뿐 백인 사회와 흑인 사회의 역학관계를 교묘히 무마하거나 가상의 극복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소시켜버린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장고 : 분노의 추적자> 역시 주인공이 흑인일 뿐 기존 서부극 서사를 대체로 충실히 따르고 있다다는 점에서 그런 비판의 여지가 아주 없지는 않겠다. 게다가 먼치킨 흑인 장고가 다소 멍청하거나 변태 같은 권력욕만을 내보이는 백인들을 아주 쉽게 쏴버리고, 말미에는 그 웅장했던 하얀 집조차 아주 산산조각 내지 않는가. 다분히 판타지적인 이미지들의 나열이자 특히 후반부의 경우는 카타르시스를 조장하려는 속도감의 연속이다. 그러니까, 두 시간 반가량 ‘저러다 잡히면 어떡하나’, ‘통쾌한 복수는 대체 언제쯤’하며 기다리던 내게 힙합 음악과 함께 총을 난사해버리는 장고의 모습이라든지, 아내를 찾기 위해 다시 돌아온 그가 집을 폭파시켜버리는 장면이라든지. 그런 게 터져 나올 때면 너무 기쁘고(?) 즐겁고(?) 통쾌하고, 장고는 또 너무 시원하게 총을 갈기니까. 앞에서 숱하게 제시되었던 폭력의 지점들과 그 순간 프레임을 메웠던 어떤 얼굴들은 가볍게 휘발된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일단은 너무 재밌어서, 나 지금 이 영화 보면서 이렇게 깔깔 웃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이상한 죄책감마저 든다.
하지만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카타르시스와 감정적 해소, 그리고 그로 인한 포즈(pause)를 목표로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일단 '1858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텍사스 어딘가에'라는 자막이 그 이유다. 물론 그 2년 후는 러닝타임 내에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먼저 선포함으로써 영화는 아주 영리하게 포즈(pause)를 넘어서버린다.
아내를 구하려는 장고의 사투는 사회적인 억압과 겹쳐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매우 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장고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아주 잠깐은 나쁜 인물이 되어 흑인 몇몇이 죽어나가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은 일도 있다. 해서 이는 명백한 영웅 서사라 할 수 없고, 그렇기에 어떤 도덕적 결함도 없는 승리와 의심스러운 카타르시스와는 구분된다.) 장고의 사적 복수, 그 순간을 목도하는 흑인들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던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장고가 총을 갈굴 때면, 카메라는 꼭 그런 장고를 ‘보는’ 다른 흑인들을 비추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장면을 맞닥뜨린 얼굴들이다. 그 얼굴들로 인해 그의 총알 난사는 사건의 종결이 아니라 도래할 사건의 예고로 기능한다. 물론 영화는 캔디의 집이 완전 폭파되면서 끝이 나지만, 러닝 타임 내 프레임들은 폭파 지점뿐만 아니라 이후에 있을 역사적 사건에도 향해 있다. ‘폭파된 하얀 집’이 그 후로도 숱하게 있을 것이고 그건 또 다른 장고들의 탄생으로 가능한 것이었음을, 장고의 복수로 내보인다. 반격의 도화선이 된 복수인 셈이다. 이 영화를 빌어 반격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반격 그 자체보다는 반격의 도화선이 된 ‘복수’이다.
흔히 거창하거나 비장할수록 정당한 사유라 이해되는 사회에서 한 개인의 억압은 쉽사리 그 무엇도 아닌 게 되곤 한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을 거냐’는 문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의 경험이 구조적 불평등에 기인한 것이라면, 거창한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사적인 문제는 전혀 무관할 수 없고, 그렇기에 ‘조개를 줍는 일’이 해일을 정통으로 가격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린 안다.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세계에 대해 검열하고 배제하며 의심의 촉을 곤두세우곤 한다. 그리고 이런 개인들이 만연한 곳이 지금의 한국이다. 한 개인의 사적인 복수가 어떻게 사회 전체를 가격하게 되는지. 그 과정을 게임처럼, 혹은 꿈처럼 재미있게 그려내는 <장고 : 분노의 추적자>는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다수 영화들은, 어떤 문제를 다루더라도 늘 거창하거나 자못 심각해서 그 속의 개인은 늘 소외되기 마련이다. 설령 개인의 문제로 시작하더라도 그건 사회로 수렴되어 무엇도 아니게 되거나 무엇이 되더라도 결코 개인의 것은 아니게 되기 일쑤다. 이 영화가 2년 뒤 남북전쟁을 조망하지 않고, 그저 캔디의 집이 폭파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부분이 유달리 좋은 건 그래서이다. 물론 캔디의 집은 그 자체로, 당시 차별과 폭력의 정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폭파는 매우 상징적이긴 하지만. 여튼, 문제의 심각성에 골몰하더라도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거창하지도 않게, 한 개인이 문제들을 폭파시켜버리는 ‘재미있는’ 한국 영화를 본 일이 거진 없다. (물론 저의 영화력은 매우 얕습니다...)
한편 장고와 다른 노예들의 관계는 꼭, 낭만적 영화와 현실 사이의 관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실의 법칙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낭만적 영화는 너무도 쉽게 현실의 법칙을 무마시켜버린다는 그 속성 때문에, 대다수 탈정치적이거나 덜 정치적인 무엇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저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사이다이자, 그래서 이 진짜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말이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마블의 히어로 영화 <블랙 팬서>가 흑인 커뮤니티와 조응하는 현상은, 영화와 현실이 스크린을 넘나들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이 될 수 있는지를 상상하게 한다.*** 현실에는 도무지 없을 것 같은 허무맹랑한 순간들이 스크린 위로 그려졌을 때 세상은 그것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 현실의 이들이 스크린 위의 세계로 말미암아, 무마되기 일쑤인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내보일 수 있는지를.
저 혼자서 저 너머의 세계를 상상해보는 일과 매우 구체적인 인물이 제 목소리를 내며 그 세계를 펼쳐 보이는 일, 그리고 그것을 함께 보는 일은 아주 다른 일이니까.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절망적인 때에는 그런 저 혼자만의 상상마저 아주 없는 게 된다. 그렇기에 상상의 힘을 부추기고, 그 상상이 비단 아주 멀리에 있는 추상적이고도 불가능한 무엇만은 아니라는 걸 보게 하는 ‘낭만적 장면’들은,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무엇이기도 하다.
*** 해당 내용 아래 링크 참조
앞서 두 작품의 발제문에서 반격의 방법 혹은 그것의 실패(혹은 성공)을 다루었으니, <장고 : 분노의 추적자>에 대해서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장고는 총을 들었으니 그의 방법은 어쨌든 폭력적이다. 반격의 정당성. 그것의 조건이 비폭력 혹은 법적 절차에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장고의 여정은 다소 부당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절차의 완성을 위해 악수를 고집하는 캔디를 떠올려보면, 그래서 그와 같은 절차가 지금에 와 대체 무엇으로 작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것들은 이미 스피커 혹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서로 간에 예의를 차리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는 수단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법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정당한 절차는 당연히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특정 집단만이 점유하거나 그래서 과시 가능한 무엇이 될 때. 그리고 그 바깥의 인물들은 할 수 없거나, 그것으로는 도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일 수가 없을 때. 바깥의 이들에게 남는 수는 결국 상대를 가격하는 것이 된다. 물론 장고가 브룸힐다를 온전히 구해내기 위해 법적 절차가 필요했다는 점. 위기의 상황에서는 수배전단지를 내보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어떤 법적 절차는 그에게 방패가 되기도 했다. 요지는 이런 것이다. 정치적·법적 절차나 혹은 그것으로 가능할 정당성이란 무조건적으로 갖춰져야 하는 무엇일 수 없다는 것. 그 시스템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는 세계에서는 더욱이.
그런 의미에서, 이 반격의 서사가 오락적인 총 난사 혹은 다소 잔인하달 수 있는 (지나치게 가볍고도 쉬운) 신체절단의 이미지로 점철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말이나 규칙 같은 것으로 서로의 안위를 지키기 급급한 사람들에게, 피가 터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고추가 잘려나가는 스크린 너머의 이미지들이 실질적 위협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난자하는 이미지는 설령 그것이 허공을 향해있다 할지라도, 너무 쉽고 가벼워서 농담이 되고 그렇게 용인되어 시스템 안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농담이 된 폭력은 얼핏 시스템에 순응적인 것도 같다. 시스템을 처음부터 뒤집어엎을 수는 없으니 반쯤 하려다만 무엇 정도 말이다. 하지만 존재가 용인된 농담은 폭력을 행하는 자보다 폭력을 당하는 자에게 가닿는다. 장고의 난사를 목도한 노예들의 얼굴이 중요했던 것처럼, 살아남은 농담은 그들에게 닿아 이런 메시지가 된다. 나 역시 무기를 들 수 있다는 것. 철옹성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억압자를 나 역시 가격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 역시 나와 같은 종류의 피를 흘리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 시스템 안에 도사린 농담이 시스템을 까뒤집을 수 있는 총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자신이든 타인이든 그것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자 그것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즉 흐르는 것임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리고 각자의 정체성이 그 자체로 이미 정당한 것임을 배우는 과정이자 그것을 환대하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한 사람이 머무는 장소, 혹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떤 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 사랑이 만연한 세계는 결국 ‘각자 모두가, 자신이 있고자 하는 장소로 향할 수 있고 또 거기에 머물 수 있는 세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매 순간 팔려가거나 잡혀오는 이들로 가득한 세계는 결코 사랑의 세계라 할 수 없다. 한편, 붙잡혀 고문당하더라도 끝끝내 탈출하려는 브룸힐다의 달리기는 사랑의 세계로의 발돋움일 것이다. 장고와 브룸힐다에게 유일한 시스템은 사랑이고 그렇기에 장고의 난사는 정당하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 장고의 복수가 성공일 수 있는 건 캔디가 죽어서도, 스티븐이 죽어서도, 그들이 사는 집이 폭파되어서도 아니다. 그게 2년 뒤 어떤 역사적 사건에 가닿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물론 그것들은 중요하다.) 말을 탄 그들이 함께 하고자 하는 이와 어디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걸음을 내딛을 수 있게 된 그 마지막 모습 덕에 <장고 : 분노의 추격자>의 복수는 사랑이 되어 성공적으로 완성된다. 물론 그들과 무관하게 돌아가는 세계는 여전히 사랑 없는 곳이라, 손에는 총자루가 들려있긴 하지만 말이다. 스크린 너머 그들의 마지막이 스윗(...)한 대사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 장고는 결국 사랑이기 위해 분노의 추적자가 되었다. 이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케 한다. 누구든, 자기 자신인 채로. 어디든 향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한 모든 분노와 반격은 결국 ‘사랑’에 관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