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바스
여기 매일같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죽게 되는 여인이 있다! 화려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젊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중년 영웅도 있다! 마지막으로 화려했던 시절도 딱히 없지만, 영웅이라고 믿고 싶은 나이 든 영웅 지망생도 있다! 이 세 가지 이야기가 합쳐지면 그것이 바로 ★키메라★
우선은 사과의 말씀부터, 이 소설은 개인적으로 스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쓰고 싶었다. 이야기 진행이 너무 기발하고 재미있기 때문에 독자분들이 언젠가 이 책을 직접 골라 읽으면서 (나처럼) 놀라움을 느꼈으면 하는 마음인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처럼 형식만큼 스토리가 중요한 소설에서 어떻게 스포를 하지 않고 쓸 수 있을까. 게다가 나의 빈약한 글솜씨가 불러일으키는 소설에 대한 오해와 왜곡 속에서 이 소설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도 많이 했다마는, 글이 어차피 인기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냥 쓰기로 한다. 응 스포야~ 그래도 읽어줘 안 읽으면 독자 없어~ 제발~
아마도 이번 글은 여태까지의 글과 마찬가지로 줄거리 소개가 대부분일 것 같다. 그러니 이제부터 간략한 줄거리 소개와 장황한 줄거리 소개를 하도록 하겠다. 이 소설은 총 세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세 가지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두냐자디아드>, <페르세이드>, <벨레로포니아드>가 그것으로 각각 천일야화, 페르세우스 신화, 벨레로폰 신화를 패러디한다. 그럼 차례대로 소개하자면.
두냐쟈디아드
이야기꾼 세헤라자데는 매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다면 다음 날 목이 잘려 죽을 운명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라는 재주를 부려 살아남은 세헤라자데, 대체 천 개나 되는 이야기를 그녀는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건 간단하게도 마신이 도와줬기 때문. 마신은 또 이 이야기들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 그는 이미 책으로 <천일야화>라는 완결된 이야기를 읽었기 때문!
그러나 첫 작품의 제목은 그녀의 동생 두냐자데의 이름을 딴 <두냐쟈디아드>. 주인공은 원전에선 단순히 이야기를 끊는 기능적이고 주변적인 인물인 두냐자데이다. 소설 속 두냐쟈데는 1000일 동안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한 샤리알 왕의 동생 샤 자만과의 결혼 초하루에 그간의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낸다. 샤 자만은 그동안 총 2000명의 여성을 강간하고 살해한 무자비한 인물. 이것이 천일야화를 다시 이야기하는 <두냐쟈디아드>.
페르세이드
반면 <페르세이드>의 주인공 페르세우스는 이제는 늙어버린 왕년의 영웅이다. 그는 한 때 페가수스를 타고 괴물을 물리친 뒤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하기도 하고, 아테네의 방패와 하데스의 가면, 헤르메스의 신발을 신고 메두사를 죽이기도 한 영웅이었다. 한 때는. 그러나 이제 그는 나이로 인한 권태를 느낀다. 어느새 노화된 몸은 다른 사람들이 메두사 때문에 그러했듯 자신도 돌이 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게 만든다. 그런 그의 앞에 새로운 신탁이 나타나는데! 그건 바로 새로운 메두사가 그를 구해줄 수 있다는 얘기. 다시 살아난 메두사는 이제 그의 연인이 되고, 페르세우스는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으로 얼어붙는다. 문제는 메두사를 본 사람이 돌이 되는 건가? 아니면 메두사가 본 사람이 돌이 되는 건가 하는 점.
벨레로포니아드
페르세우스가 별이 된 지 20년 후 벨레로폰이라는 영웅이 다시금 고민에 빠져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너무 행복하므로 영웅이 아니다. 따라서 진짜 영웅이 되기 위해 유행하는 소설 <페르세이드>를 롤모델 삼아 영웅의 패턴대로 삶을 개척한다. 그러나 삼류 영웅인 그에겐 패턴대로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가 마주하는 사건들은 항상 패턴에서 어긋나고, 사람들은 그가 영웅인 것에 관심이 없다. 그의 업적인 키메라 죽이기 마저 세간의 의심을 사는데.......
<천일야화>라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이야기하면서 이야기는 '이야기하기'에 대해 맞춰진다. 마신으로 등장한 작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얻게 되고, 두 편의 이어지는 소설을 고안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쓴 <두냐지아드>까지 총 세 편의 글이 마치 합성 괴물 키메라처럼 하나의 작품을 이루게 된다.
첫 번째 소설 속에서 마신을 불러내는 주문은 ‘보물 열쇠가 보물이다.’이다. 셰헤라자데가 원하던 보물은 스스로와 여성들을 구할 이야기이고, 열쇠는 따라서 이야기하기 자체가 된다. 천일야화의 원본 서사가 이야기하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도 ‘이야기하기’라는 행동이 실상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첫 번째 이야기 또한 두냐자데가 샤 자만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므로 이 공식이 적용되는데, 다만 상이한 설정을 통해 기존의 이야기를 변형시킨다.
우선 천일야화에서 피해자로 나타나는 여성이 이 이야기 속에서는 일시적이고 조건부이긴 하지만 권력을 지닌 인물이 된다. 천일야화에서 말하는 이야기꾼은 항상 목이 달아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야기 속에선 남녀의 관계가 역전되며, 남자인 샤 자만이 이야기꾼으로,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인물로 나타난다.
이어서 페르세우스에서도 말하는 인물은 영웅 남자이다. 그는 자신이 겪은 무용담을 무녀에게 말하는 장면을 자신의 연인에게 이야기한다. 이 또한 이야기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야기인 것. 이야기를 통해 규칙적으로 확장되는 이야기가 <페르세이드>이다.
벨레로폰의 이야기에 이르러서는 <페르세이드>는 이미 고착화된 이야기이다. 벨레로폰은 페르세우스의 이야기를 본받아 자신의 신화를 만들길 원하고, 또 그것을 지시하는 것은 예언가의 예언들,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엔 벨레로폰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간 묻혔던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세세하게 들춰냄으로써 벨레로폰의 신화가 실상 허구이며, 이야기일 뿐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려진 이야기들을 살려내서 신화의 세계를 각각의 이야기들의 집합체로 재구성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을 빌려와서 이야기 자체가 지닌 가능성을 시험하고 이야기의 힘을 과시한다. 등장인물인 마신이자 예언가이면서 동시에 작가 자신인 세 작품의 작가는 세헤라자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하기가 곧 보물임을 깨달은 인물이다. 그는 이야기하기를 통해 이야기를 하는 실제 작가 존 바스의 페르소나이기도 하다.
벨 : 전혀 그렇지 않소.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위대한 발명품이 아니라는 거였소. 그 안에 독창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어. 그것은 누구에게 해가 되지도 않았지만,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 그것은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의 은유적인 힘도 예를 들어 메두사나 스핑크스와 비교하면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지. 그것이 저 위 분화구 안에서 내 창끝에 달린 방을 녹임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일조했던 것도 그 때문이오. 죽음만이 키메라의 유일한 신화 시학적 요소니까 말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정말로 키메라를 죽인 순간 그것을 이해했소. 그렇다면 리키아로 갈 필요가 없었지. 나는 방향을 바꿨고 아테네의 고삐를 내팽개친 후 박차를 가하여 올림포스를 향해 곧장 날아갔소.
폴 : 자네의 죽어 가는 아버지가 정중하게 묻겠는데, 그 불멸성이라는 것이 이미 불쾌한 환각 체험이라고 결론을 내린 자네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과대망상인가? 부조리에 대한 거창한 긍정인가? 450p
이야기는 때로 권력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저항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현실을 모방하고, 박제하며, 재창조한다. 신화와 같이 강력한 이야기는 재창조될 때마다 현실의 가치에 맞춰 다시 탄생하며, 그동안 소외된 인물들에게 새로운 목소리를 부여하고 개성을 표출하게 한다.
이것이 작가가 신화를 패러디하는 방법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간 이유이다. 그는 이야기하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 자체와 이야기의 전달 과정을 모방해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다시 한번 작중에서 패러디되어 작품이 흐를수록 변하는 인물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이야기의 재창조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원전과 다른 인물들의 권력관계이다. 특히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비틀어 재조명하며, 여성화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해 남성 중심의 신화를 파헤치고 해체한다.
왕에게 앙심을 품고 매일같이 바람을 피우는 세헤라자데는 두냐자데와 함께 왕을 죽일 예정이며, 반대로 왕들은 강간과 살해의 대가로 살해당한다. 그리고 이 전도된 권력관계에선 원전과 다르게 남성이며 권력자인 왕 샤 자만이 이야기를 한다.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서.
두냐자데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생기 없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자신의 언니가 계획한 복수의 한 측면은 이렇게 (마신이 이해한 대로) 화자와 청자의 성별이 전도되는 것은 물론 그들의 상황 또한 전도되는 것이다. 보시다시피 지금은 청자의 목숨이 화자의 마음(mercy)에 달려 있으므로. 61p
그러나 두냐쟈데가 비록 왕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긴 했지만, 그녀도 왕을 살해한 뒤 역시 죽어야만 했다. 다만 이 작은 사건이 흐르고 흘러서 후에 아마존이라는 여성들의 이상향인 나라를 만드는 계기가 되고, 점차 역전되고 균형을 찾는 인물들의 권력관계의 신호탄이 된다.
<페르세이드>에 이르면 이야기는 보다 더 평등하게 이뤄진다. 여성은 이제 첩이 아닌 대등한 연인의 지위까지 올라선다. 페르세우스는 나이 든 중년의 퇴물 영웅이고, 안드로메다는 영웅에게 일생을 바치고 후회하는 주부이다. 반면 페르세우스의 새로운 영웅담 속에서 메두사는 더 이상 암컷 괴물이 아니다. 신에게 강간당한 불운한 여성이며, 페르세우스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는 여성으로 재탄생한다. 이제 메두사는 사랑의 화신이다. 그녀가 지닌 돌로 만드는 저주는 새로운 이야기 속에선 사랑에 빠진 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효과가 된다.
……내가 페르세우스 베타 별 위로 들고 있는 것은 뱀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여인의 머리카락이야, 메두사. 나는 만족해. 이 결말, 우리의 마지막 상태에 대해서도. 마치 우리의 말들을 악보에 옮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들을 순 없지만 볼 수 있는 별자리 음표들이 된 것, 볼 수 있는 눈과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된 것, 영원토록 당신을 불러낼 것이고 우리의 이야기는 남자와 여자들이 별자리를 읽는 한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밤마다 늘 되풀이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도……. 202p
약간은 로맨스 소설 같은 이 이야기는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끝이 난다. 그러나 이 이야기 역시 페르세우스에 의해 말해진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다. 사랑의 저주는 여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뿌리 깊은 편견이 메두사에게 잔존한다. 그리고 메두사는 여전히 영웅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다. 다만 이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질문을 할 뿐이다.
메두사의 질문은 '누군가가 메두사를 봐서 돌이 되는 것이냐?', 아니면 '메두사가 봐서 돌이 되는 것이냐?'이다. 비슷하게 다른 두 질문 중 하나는 메두사의 의지가 들어있고, 하나는 없다. 그 전까지의 신화 속에선 이 근본적인 질문이 방치된 채 돌이 된 책임을 메두사에게만 물어왔다. 그러나 이 의문에 대해 페르세우스는 대답하지 못한다.
“당신이야말로 이 가정(家庭)에서 괴물이에요! 곰곰이 생각해 봐요, 내 사랑. 만약 <페르세이드>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우리에게 다른 역할을 맡겼을 거예요. 내겐 매력적인 역할을, 당신에게는 보다 덜 매력적인 역할을요. 문학적인 질문을 하나 더 하겠어요. 절정에 이르기 바로 전의 일 그러니까 안드로메다가 당신과 다나오스 사이에 몸을 던지는 부분 말이에요……. 그것이 통속적이라는 데 동의하나요?” 195p
여전히 페르세우스는 영웅의 모습을 한 별자리이고, 메두사는 목이 잘린 채 붙들려 있다. 둘의 불균형적인 구도는 그대로 남녀관계의 한 전형이 되어 신화와 별자리 속에에 박혀있다.
이제 마지막 <벨레로포니아드>에 이르면 여성들은 패턴화 된 역할을 벗어난다. 이야기 속에서 패턴화 된 인물은 스스로를 영웅으로 고착화시키고 싶어 하는 벨레로폰 밖에 없다. (물론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는 영웅이라기엔 별 볼일 없는 인물이다.), 안테이아는 벨레로폰의 기억 속에선 허망한 꿈을 꾸는 늙은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다시 만난 안테이아는 다소 역차별적인 여성 왕국을 만들어낸 여성 영웅이며, 그녀의 내면은 남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게다가 영웅에 대한 갈망 때문에, 반의 반신을 만들고, 페르세우스를 계략에 빠뜨려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페르세이드>가 페르세우스 신화를 변용시켰듯이, <벨레로포니아드>는 <페르세이드>를 다시 한번 뒤집는다. <페르세이드>또한 누군가한테 쓰인 이야기일 뿐)
그의 부인 필로노페는 헌신적인 여성이긴 했지만, 벨레로폰보다 똑똑해 그의 신화를 만들고 유지해주는 유능한 인물이다. 그의 첫사랑 시빌은 그가 지닌 첫사랑에 대한 추억과는 다르게 쾌락에 자유로운 인물로 등장하며, 현재 그의 연인이자 청자인 멜라니페는 자신의 개성과 목소리를 온전하게 찾는 유일한 인물로 등장한다.
벨 : 전혀 그렇지 않소.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위대한 발명품이 아니라는 거였소. 그 안에 독창적인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어. 그것은 누구에게 해가 되지도 않았지만, 도움이 되지도 않았지. 그것은 무시무시한 것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것이고, 심지어 그것의 은유적인 힘도 예를 들어 메두사나 스핑크스와 비교하면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지. 그것이 저 위 분화구 안에서 내 창끝에 달린 방을 녹임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에 일조했던 것도 그 때문이오. 죽음만이 키메라의 유일한 신화 시학적 요소니까 말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정말로 키메라를 죽인 순간 그것을 이해했소. 그렇다면 리키아로 갈 필요가 없었지. 나는 방향을 바꿨고 아테네의 고삐를 내팽개친 후 박차를 가하여 올림포스를 향해 곧장 날아갔소.
폴 : 자네의 죽어 가는 아버지가 정중하게 묻겠는데, 그 불멸성이라는 것이 이미 불쾌한 환각 체험이라고 결론을 내린 자네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과대망상인가? 부조리에 대한 거창한 긍정인가? 450p
벨레로폰의 과업대상인 키메라도 메두사처럼 여성으로 등장한다. 벨레로폰은 여성 괴물을 죽였다는 거짓말로 영웅이 되려 한다. 애초에 키메라는 있던 것들을 대강 조합한 괴물이다. 사자와 염소와 뱀을 대충 섞어 만든 괴물. 창의력 없는 괴물은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반면 페가수스는 괴물이 아닌 반신이며, 영웅의 형제이다. 등장하는 짐슴들조차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 대우가 갈렸다. 그러나 그들의 신화 속 위상과는 다르게 키메라는 잘 살아남고 페가수스는 어처구니없이 죽는다. 이렇게 괴물이 여성이라는 설정은 다시 한 번 신화의 허구성과 여성에 대한 근거 없는 편견을 드러내는 거짓말로 전락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신화 속 인물들은 새로이 개성을 획득하며 재탄생한다. 주변으로 벗어난 인물들은 신화가 허구라는 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권력자(주로 남성)의 입장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리고 이런 역할은 이것이 바로 두 폭로자 두냐자데와 멜라니페를 통해 구체화 되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그녀가 외쳤다.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그건 가짜예요! 허점투성이죠! 그 가운데 내가 쓴 부분은 한 군데도 없어요. 당신이 썼죠. 단어 하나하나 모두. 그리고 당신은 내가 해방되었느니, 아무런 고민거리도 없다느니, 불멸이니 어쩌니 하는 얘기들을 모두 지어냈어요. 얼빠진 얘기죠. 만족은 무슨 얼어 죽을! 내 생각엔 만족은 치명적인 말이에요. 만약 내가 메두사라면, 그리고 나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하게 되어 행복하냐고 페르세우스에게 물었을 때 그가 만족한다고 하면, 나는 그의 눈에 침을 뱉을 거예요! 429p
그러나 두냐자데가 고전적 신화에 대해서만 폭로했다면, 멜라니페는 이 작품이 필연적으로 지닌 또 다른 문제점을 폭로한다. 작중 <벨레로포니아드>는 멜라니페에 의해 쓰였다고 하는 벨레로폰이 쓴 이야기이다. 멜라니페는 바로 그 점을 폭로한다. 심지어 여성은 <천일야화> 속 세헤라자데처럼 혹은 이 작품 속 멜라니페나 두냐자데처럼 이야기를 쓰고 전달하는 이야기꾼으로까지 쓰였다고 폭로하는 것. 실제 작가 존 바스가 남자라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말이다. <키메라>는 어쩔 수 없이 남자에게 쓰인 소설일 뿐이고, 그 작품은 불균형적인 시각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작가는 여성 멜라니페의 입으로 폭로한다.
작가는 작품의 한계를 자조와 패러디를 통해 드러낸다. 이 부분이 나에겐 충격적인 부분이었는데, 소설 속에서 작가와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작품은 흔하지 않다. 소설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침범하는 현실의 모습은 어쨌든 독자의 기대와는 정면배치되는 부분이 있고, 소설의 완전성을 깨트린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현실과 신화 혹은 이야기 사이의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치 모세혈관처럼 미세한 균열들을 통해 융합시킨다. 그리고 이 소설이 이야기 자체에 대한 패러디라는 점이 소설의 반항적인 스토리를 가능하게 한다. 그렇게 얻은 효과는 아마도 문학 작품의 필연적인 한계인 책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책이 강요하는 하나의 시각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견해들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것. 실제 세계는 하나의 작품보다 많은 생각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런 작품너머의 견해를 인정하면서 실제 세계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어쩌면 스스로를 자조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의 가능성만을 제시하는 것이 작품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작가 존 바스는 미국의 소설가이며 포스트모더니즘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대표작은 <연초 도매상>으로 사실 난 이 책을 읽으려 했지만 엄청난 두께를 자랑해서, 상대적으로 얇은 <키메라>를 읽었다. 이 책을 읽고 작가와 같은 의문점이 생겼기 때문에 아무래도 작가에게 놀아난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문제는 현재 국내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 과연 남자가 쓴 여성에 관한 이야기가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하는 점이고, 또 완전히 다른 사람을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래도 작가는 앞서 말한 대로 여지는 만들어놨다. 성에 관해 편견이라 생각되는 장면도 많았지만, 그 한계를 스스로 지적해 어느 정도 참작할만하달까. 아무래도 나의 한계또한 여기까지인 것 같으므로 여자 사람 친구들에게 읽어보라고 권유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