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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y 29. 2018

22. '타인'과 '나'의 거리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사건>

*느빌의 책방에서는 "멘붕"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타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뫼르소, 살인사건> "타인" 3부작 중 첫 번째 텍스트입니다.



0. 멘붕은 '타인'으로부터 비롯한다


  이전 키워드인 ‘멘붕’의 작품을 읽으면서 든 생각 중 하나는 ‘멘붕’을 일으키는 수많은 상황들이 전부 ‘타인’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창문 넘어 도망친 백세 노인>은 많은 사람들과 세상사에 수많은 영향을 끼친 대단한 타인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인이었던 줄리엣이 또 다른 타인인 동생 레아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다. <고발>에서는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타인(북한)에 대한 현실을 직면할 수 있었다.


  또한 최근 발제자에게 '멘붕'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것 또한 '타인'이었다. 일을 하며 계속해서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는 것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엮이지 않고 혼자 일하고 혼자 살면 외로울지언정 내 정신상태는 온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매일 하곤 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반강제적으로 ‘타인’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타인이 괴로울 수 밖에 없는 것은 모두가 각자의 시선으로 상대방과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뫼르소, 살인사건> 또한 이 지점으로부터 탄생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소설의 주인공 '뫼르소'는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을 담아낸 명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왔다. 하지만 그 뫼르소에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당한 '아랍인'에 대해서는 반세기가 더 지나도록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이방인>, 살아남은 자의 이야기’라는 부제와 함께 ‘타인’이라는 키워드에 딱 맞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     두 번의 살인과 두 명의 살인자


  1942년,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의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뫼르소’라는 프랑스인이 있다. 그는 어느날 갑작스레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하지만 장례식에서는 담배를 피우고 여자친구와 놀러다닌다. 그러다 이웃남자인 레몽과 친구가 되고, 그의 일에 휘말려 그리고 우발적으로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그는 재판을 받으녀 그저 태양이 눈부셨기 때문에 살인을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재판이 문제 삼은 것은 아랍인의 죽음이 아닌, 어머니의 죽음에 제대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 받게 되고 죽음을 앞두고 찾아온 신부가 죄를 털어놓을 것을 권하지만, 죽음으로 삶을 증명하기 위해 이를 거부한다.


  1962년, ‘하룬’이라는 알제리인이 있다. 그는 어느 날 갑작스레 형을 잃어버린다. 그의 어머니는 형의 흔적을 계속해서 찾아 다니고 그에게도 형의 삶을 살도록 강요당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조제프’라는 프랑스인을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알제리의 독립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집에 숨어들어온 프랑스인이었다. 결국 그는 살인으로 인한 추궁을 받지만 살인을 했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 살인이 독립전쟁 이전이 아니라 이후에 일어났다는 점 때문이었다. 숭고한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마음대로 그를 죽였기 때문에. 그는 결국 별 다른 선고를 받지 않고 풀려나고, 그는 자신이 형을 쏴 죽인 ‘뫼르소’와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2.     이름 없이 죽은 형의 동생


무싸, 무싸, 무싸…… 난 가끔씩 형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러보곤 한다네. 이 이름이 한낱 무의미한 글자로 흩어져 사라져버리지 않게 하려고. 나에겐 중요한 일이야. 자네도 형의 이름을 큼지막한 글자로 한 번 써보지 않겠나. 한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은 지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게 된 거니까. 꼭 써봐야 하네.


  대부분의 역사는 어느 한 사람의 관점에서 쓰여지고, 소설 또한 어느 한 화자의 시선에서 쓰여진다. 그렇게 기록되고 남아있는 것이 결국엔 사실이자 주류가 된다. 많은 독자들과 학자들이 뫼르소의 심리와 행동에 집중하며 <이방인>이 세계명작이 되는 동안, 총살 당한 ‘아랍인’의 존재는 잊혀져 왔다.


   하지만 <이방인> 속에서는 그저 잠깐 등장하고 죽어버리는 아랍인도 어머니와 동생이 있는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잊혀져있던 동안 가족들에게는 이 잊혀짐마저 큰 상처였다. 동생인 하룬은 끊임 없이 형인 '무싸'의 이름을 부르짓는다. 마치 이름도 이유도 없이 죽고 사라진 형 무싸를 그 잊혀진 세월만큼을 다시 불러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뫼르소, 살인사건>은  '아랍인'의 입장에서 <이방인>을 다시 읽는 작업이자 잊혀진 형의 죽음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뫼르소가 살인의 이유를 단지 ‘태양빛이 너무 눈부셔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가족들에게는 크나큰 모욕이 될 수 밖에 없다. 뫼르소가 살인보다도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것을 비난받는 상황 또한 마찬가지이다. 눈 앞에 있는 확실한 피해자를 대변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작가는 <뫼르소, 살인사건>을 통해 프랑스인의 식민지배와 당시의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정말로 좋은 작품이라고 느껴진 것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기 때문이다.



3.     나에게서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 건 형의 흔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 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라는 일만 남았다." 맙소사, 이거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하룬은 어느 날 찾아온 여자를 통해 <이방인>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 자신의 형의 죽음이 적혀있었다는 것을 알고 책을 읽지만, 정작 발견한 것은 살인자인 뫼르소가 사실은 본인과 몹시 닮아 있다는 것이었다. 똑같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고, 그 죽음의 이유에 있어서도 별다를 것이 없고, 살인의 죄값을 제대로 치르지도 않는다.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타인에게서 절대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나도 모르게 닮아 있음을 깨닫는 순간, 끔찍한 타인으로 여겼던 누군가와 내가 사실은 닮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자신의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뫼르소, 살인사건>은 그저 타인(뫼르소 또는 프랑스)을 비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타인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모순에까지 나아간다. 이는 소설 중간중간에 ‘엄마’나 종교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소 집착적으로 형의 존재를 쫓고 프랑스인을 죽이게 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코란을 비판하는 구절 등이다.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마찬가지로 폭력을 가하고 폭력이 행해졌던 독립 이후의 어느 알제리의 상황이 뫼르소와 하룬의 겹쳐진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을 읽으며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며 <이방인>이나 <뫼르소, 살인사건>이 담고 있는 시대와 역사적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4.     언어에 대해


내가 이 언어를 배운 것도, 어느 정도는 태양의 친구였던 내 형을 대신해 얘기하기 위해서였어. 자네한테는 허황되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잘못 안 걸세. 난 대답을 찾아내야 했네. 꼭 필요했던 때에 아무도 주지 않았던 대답을 말이야. 어떤 언어를 마시고 언어를 말하다 보면, 어느날엔가는 언어가 우리를 소유하게 되지. 그렇게 어느새 언어가 우릴 대신해서 대상을 포착하기 시작하고, 연인들이 격렬한 키스를 통해 상대의 입을 점령하듯 그렇게 입을 점령해버리는 거야.


  소설에는 '언어'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언어를 배우는 것과 언어를 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우선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언어를 바탕으로 그 언어를 둘러싼 역사, 문화, 문학을 이해할 수 있다. 때문에 알제리 출신의 하룬이 형을 찾고 형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뫼르소의 언어인 프랑스어와 프랑스에 대해 배우는 것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있다. 말할 수 있다는 것. 말이 없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말함으로서 그 존재를 들어낼 수 있다. 이전까지는 말해지지 않았던 것을 언어를 배움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뫼르소, 살인사건>에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무싸'는 계속해서 잊혀진 존재였을 것이다. (최근의 페미니즘, 미투운동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제서야 말할 수 있게 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타인'과 '나'는 멀지 않다.


  결국 ‘타인’으로 돌아와서. <뫼르소, 살인사건>은 <이방인>의 뫼르소로부터 잔인한 타인의 면모를 발견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스로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처럼 '잔인한 타인'은 그들 각각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거나 최선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어려운 지점이다. 서로 절대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은 그저 짐작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타인일 수 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견고한 벽에 작은 금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타인'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조금은 타인과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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