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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n 05. 2018

지워진 존재들의 시선

22-1 <뫼르소, 살인사건>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타인 키워드의 첫 번째 텍스트입니다.


*이번 모임엔 박루저, 이주, 학곰,  해정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뫼르소, 살인사건〉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발제문 바로가기: https://brunch.co.kr/@neuvilbooks/16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뫼르소, 살인사건

    

이주 : 우선 책을 고른 이유는 멘붕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서(;;)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뫼르소, 살인사건>이라는 책을 발견했고, 타인이라는 주제로 엮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어요. 처음에는 카뮈의 <이방인>을 까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지워졌던 아랍인의 시선에서 말이에요. 하지만 읽다보니 단순히 그보다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이야기해볼 거리가 많을 것 같았어요.

     

박루저 :  우리가 흔히 고전을 말할 때 영미 고전을 고전이라고 하잖아요. 이 책은 고전에서 주변인으로 지워지는 존재들이 문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단순히 주변인의 시선으로 본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알제리인의 시선으로 알제리인을 돌아보는 소설로 나아가서 좋았습니다. 이런식으로 고전에 반기를 드는 것이 평론이 아닌 문학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적극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단순히 반기가 아니고 비판을 하고나서 다시 자신의 현실로 돌아오는 느낌이 있어서 좋았습니다.


해정 : 주인공이 <이방인>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간 찾아왔던 형의 행방이라든지 형이 어떻게 죽었는지, 살인사건에 관련된 구체적인 정보보다는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이방인>의 뫼르소) 나와 굉장히 닮아있다는 것을 발견하잖아요. 지워진 존재를 회복시킨다는 PC한 목적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 고백적인 내용까지 담겨있는 듯해서 흥미로웠어요. 문체는 유럽의... 아저씨(?) 느낌이었는데 평소에 접하지 않았던 거라서 재미있었어요.


학곰 :  저는 읽기가 어려웠어요. 친구끼리 대화할 때도 한쪽만 얘기하는 것을 들어줄 때 피곤하거든요. 이 책은 70대 할아버지가 한 권을 지얘기(?)만 하는 구성이기에 힘들었습니다. 재밌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 포인트로 읽었어요. 첫번째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문득 마블의 영화들이 생각났어요. 저는 마블에 재미를 못 느끼는 편이에요. 퍼스트어벤저 하나 봤어요

박루저: 안봐서 재미를 못느끼는거예요(웃음)



학곰: 저는 이름이 부여된 아이언맨이나 캡틴 아메리카 같은 히어로에 몰입을 하기 보다는 시가지전에서 대피를 하고 있는 시민에 몰입을 하게되더라고요. 그래서 좀 그래요.(단-호) 그런면에서 이름이 지워진 조연들의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지지부진하게 독백, 자기고백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론 힘들었지만요.

두번째는, 한편으로 주인공은 자기고백으로밖에 얘기를 할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은 '억압'이라는 키워드였어요. 본인이 원해서 형이 죽은 것도 아니고, 그 죽음으로 인해 그에게 부여되는 것들 때문에 주인공이 눌려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고통스럽기에 일부러 말을 돌리고, 한 이야기를 또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은 아니었을까요.


박루저 : 저는 반복이거나 지지부진한 이야기로 보이지 않았어요. 일상에서 접하게 되는 것들로만 제한되어 있던 주인공이 언어를 배우고 책을 읽으면서 자신한테는 큰 존재였던 형이 책에서는 이름도 없이 표현되는 것, 형의 죽음은 그저 나라의 실존주의 철학을 드러내려고 사람을 죽이는데 그게 그저 아랍인일 뿐이었다는 것 등을 발견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서 전 재미있게 읽었어요. 그냥 문체가 별로였었어요.(웃음)

 



이방인의 시선, 권력의 시선



해정: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프랑스 사람들한테는 우리나라로 치면 <무정>같은 느낌일거 같은데...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문학적/학술적으로도 반복적으로 해석해온 텍스트였을텐데, 이런 식으로 해석한 사람이 처음이라고 가정을 했을 때, 거의 반세기 이상 흐른뒤에야 이름없이 죽어버린 이방인을 호명하는 시도가 나온 거잖아요. 그 시간의 간극이라는 게 이상하게 다가왔어요. 그 시간동안 이것에 대해 의문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박루저 :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었어요. 문학에서는 피해자로 죽어간 사람들을 호명하는 것은 없었고 우리가 못보던 주변인을 주목했던 것은 없었던거 같아요. 이런 시도가 너무 늦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불어 한국에서는 나올 수 없는 시도라고 생각을 해요. 문학이 가진 엘리트 주의 안에서는 일어나기가 힘든 자기들이 쌓아온 고전이라는 명예 안에서 문제지적을 해야지만 쓸 수있는 소설이니까요.  


저는 한국에서의 문학부심이 기준을 영미권에 둬버리는 엘리트의식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사실 영미에서 봤을 때 우리는 주변부 찌끄레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찌끄레기라는 생각은 안하고 영미의 시선으로 책을 읽잖아요.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알제리인의 시선으로 책을 읽는게 맞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태 보아왔던 시선에서 벗어나서요.

     

해정 :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다른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한 평론가가 영화에 관해 글을 쓸 때 자기 안의 수많은 자아들 중에 특히 백인 남성 할아버지(주로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상)의 목소리를 밀어내는 일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구요. 생각해보면, 이 세계의 주인공은 주로 백인 남성으로 정형화되어있잖아요. 그래서 나는 백인 남성이 아닌데, 그것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기도 하구요.

사실 우리는 주변부 찌끄레기인데 알제리인이 아닌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든지. 주인공, 그러니까 나와 접점이 거의 없지만 화면을혹은 서사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 서사를 이끄는 화자에게 감정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언어의 권력과 타깃


이주 : 작가는 알제리는 아랍어와 프랑스어(식민지 시절의 잔재)를 같이 쓰는 문화권인 것 같은데 왜 책은 아랍어로 쓰지 않고 프랑스어로 썼을까요? 작중 주인공의 죽은 형도 아랍사람이고 나중에 얘기하려는 것도 알제리의 국가적인 문제점에 대해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굳이 프랑스어로 썼다는 점에서 궁금했어요.

그리고 언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잖아요. "언어를 배워서 ~~을 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언어를 몰랐기 때문에 말을 못했다." 같은. 아랍어로 썼을때 독자의 풀이 적어진다거나,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번역을 했을 때 제대로 전달이 안되어서 그랬던 것일지...

     

해정 : 책의 작가를 주인공 하룬이라 가정하고 말을 한다면, 그가 이 책의 내용이 닿았으면 좋겠다라고 설정한 독자는 아랍인은 아니었을 것 같고,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그러니까 <이방인>을 아는 사람이었을 것 같아요. 프랑스 문학의 정점이라 여겨지는 것을 가격하는 내용을 프랑스어로 쓴 것 자체가.

     

박루저 : 프랑스인이 있기 전까지는 각자를 구분할 수 있는 알제리인이었는데, 그들이 오고나서는 그저 흑인이 되어버렸다는 부분이 있었어요. 내가 흑인일 때는 스스로를 흑인으로 인지할 수 없는데, 프랑스인이 옆에 있을 때 흑인임을 인지하는 대목이요. 저는 알제리인이 프랑스 문학을 읽었을 때 주인공처럼 죽은 아랍인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는데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의 시선이 내재화된 사람들한테는 문제의식이 없지 않을까 싶어서... 이것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가지지 못했던 프랑스어로 된 <이방인>을 읽은 사람들을 저격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정치적인, 그리고 성찰하는 글쓰기

  

이주 :  주인공이 정치적인 의도로 썼다기보다는, 정치에 반하는 것을 이야기에 담아서 정치적이었던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책을 읽으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계속해서 형에 대해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일제 시대의 역사를 주입하려고 하는 권력/ 정치적인 행위와 유사했던 것 같아요.


해정 : 알제리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쓰기 어려운 소설이었던 것 같아요. 식민지 사람이 쓰기 가장 쉬운 소설은 이를테면 "일본 짱 나빠!" 하는 식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게 쓰지 않고, 식민지배를 하는 사람들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과정까지 나아가고, 나중에 가서는 그 세계(알제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종교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코란을 읽지 않고, 기도나 금식도 하지 않는다는 선언)는 표현 자체가 정치적인, 종교적인 전제에 반하는 것 같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정치적이라고 이해했어요.


박루저 : 저는 오히려 알제리인이 할 수 있는 적극적인 자기성찰로 생각했어요. 주인공이 알제리인으로 당했던 것은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간의 다툼에서 하위층으로 있었고, 그래서 단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아요. 그렇다보니 종교나 전체주의에서 일어나는 폭력도 싫어하게 된 것이고, 알제리인이 프랑스인들에게 하는 폭력도 싫었던 것은 아닐까요. 개인이 사라지고 집단으로 생기는, 국가나 민족으로 생기는 폭력을 직감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까지 나아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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