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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n 27. 2018

23. 타인의 삶

내 귀에 도청장치가 들어있다.

*느빌의 책방에서는 "멘붕"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타인"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타인의 삶>은 "타인"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1.
 처음 ‘타인’이라는 주제를 들었을 때 1차원적일지는 몰라도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이 <타인의 삶>이었다. 독일영화 자체를 접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동독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는 희소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구 동독 시절(1984년, 서기장으로 회네커가 있을 무렵)을 배경으로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이자 배우인 ‘크리스티안’ 그리고 그들을 도청하라고 지시를 맡은 비밀경찰 ‘비즐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동독의 슈타지는 냉전시절 최고의 정보기관이었는데, 각 나라의 방첩/공안 기관의 인구대비 비율에서 무려 175:1이라는 엄청난 수치를 보유하고 있다. FBI와 KGB(소련)이 각각 32037:1 / 5380:1 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전 국민이 공안 기관의 감시 아래 살아왔다는 얘기다. 



 비즐러 역시 명령에 따라 드라이만과 크리스티안을 도청한다. 2교대로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보고서를 작성한다. 처음에 드라인만은 동독의 체제에 유연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동료였던 연출자가 자살한 것을 계기로 빌트지(서독의 유명한 일간지)에 글을 기재한다. 하지만 드라이만의 혐의는 입증되지 못했다.  




2. 
 드라이만이 슈타지에 걸리지 않고 글을 쓰고, 실을 수 있었던 이유는 비즐러였다. 영화 초반, 그는 학생들에게 취조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냉혹한 비밀경찰의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나 드라이만과 크리스티안을 도청하며 냉철함 속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다른 모습을 깨닫는다. 소위 말하는 FM인생을 살아온 그의 변화는 영화 내내 묘사된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엘리베이터에서 아이과 말하는 장면.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아저씨 나쁜 사람 이래요.’라는 말을 듣고 그는 ‘아버지 이름이 뭐니?’ 라고 묻기 직전, 아버지를 ‘공’으로 치환한다. 드라이만과 크리스티안을 도청하며 국가가 국민에게 간섭하고, 그들의 삶을 망쳐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사는 이를 바라보며 자신 속에 있던 것을 깨달은 것. 그리고 이를 계기로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대응하는 용기가 생긴 것. 이 두가지가 영화 런닝 타임에서 비즐러의 변화였다. 사실, 영화 초반의 비즐러는 냉혹하긴 하나 비도덕적인 인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자신의 동기이자 상관인 그루비츠나 헴프 장관과는 다르게 강직하다. 다만, 너무나 완벽하게 하려는 나머지 인간성이 결여되었다고 해야 할까. 그 속에 있던 인간성을 깨운 것은 예술가들의 삶이었던 것 같다. 타인을 들여다 보았을 때 자신 안의 모습들 중 타인과 비슷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를 통해 타인과 나 사이의 간격이 좁아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3.
 하지만 영화에도 명백히 한계는 존재한다. 비즐로가 타인의 이야기를 들은 방법은 ‘도청’이었다. 도청은 말 그대로 ‘몰래 듣는 것.’ 영화의 스토리가 낭만적(?)으로 흘러갈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각본에 의해서 였던 것이지 도청은 남의 사생활을 침범하는 중범죄에 해당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영화와 정 반대되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감시에 의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이 포착되면 국가에 의해 잡혀가 고문을 받고 죽었을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개인과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체제유지를 위한 단속. 그 단속에 의한 도청은 개인의 사생활을 무시하고 침범한다. 그런 식으로의 방법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서로가 인지하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얻는 상대방의 정보와, 개인이 그의 공간에서 생각하고 뱉는 언어 정보를 몰래 캐는 것은 아주 다른 일이다. 전자가 관계를 위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일방적인 침해에 가깝다.  



4.
 그럼 현재의 우리는 어떨까? 과연 우리도 도청이나 사생활 침해에 대해서 안전할까? 나는 그 답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한다. 도청장치를 깔고 몇 사람이 하루 종일 매달려야 나왔던 그 시대의 도청과는 달리, 우리는 스스로 우리의 정보를 웹에 뿌린다. 각종 혜택을 주는 사이트에 가입하거나 지인들과의 연락을 위해 SNS에 가입을 하면서 이름과 주소, 이메일 같은 정보를 무료로 그들에게 제공한다. 서로와 서로가 연결된 21세기라고 하지만 커넥트(connect)라는 것은 서로가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남의 정보를 쉽게 탈취하여 제공하지 위한 것이 아니다.



 개인정보 유출은 꾸준히 있었다. 금융권의 정보가 새나갔던 일로 며칠 간 떠들썩했던 적도 있었고 최근에는 페이스북의 개인정보 유출 사례가 있었다. SNS에서의 유출은 더욱 심각한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의 사진과 행적, 그리고 친구나 비공개로 돌린 정보도 포함된다. 마음만 먹으면 구글링을 통해 한 사람의 신상을 터는 것쯤은 별거 아닌 세상이 아닌가? 


 하지만 이와 반대로, 빅데이터 시대에서 우리 생활의 편의를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철저하게 세그멘테이션 된 정보를 통해 우리는 제품을 추천 받고, 우리의 취향에 맞는 쇼핑을 하곤 한다.  


그래서 기술을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수 많은 사람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때, 개인정보 유출과 같은 단점이 있는 반면, 빅데이터를 이용한 여러 편의 서비스 또한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또 인간의 문제로 돌아온다. 여기에는 사용자와 관리자의 문제도 포함되어있다. 자신이 판단하여 제공할 만큼의 정보만 줄 수 있는 방법도 있고, 관리자도 인증에 필요한 정보를 제외한 다른 정보는 암호화 하여 접근할 수 없는 방법을 고안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합의점을 찾기에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우리가 미디어와 컨텐츠의 노예가 된 것은 아닌지. 가입하는 사이트나 미디어에서 요구하는 정보가 무엇이고, 내가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여 쳐내는 연습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많은 타인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예전의 그것과는 달라졌다. 웹상에 있는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나의 정보는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 지. 타인의 범위는 어디까지 확장 혹은 축소되었는지 생각해봄직 하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타인의 삶>을 보고 함께 나눈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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