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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Oct 30. 2018

외로웠나요? 외롭지 않았나요?

29-2. 『가면의 고백 』 뒷담화

*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 발제문과 뒷담화는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 이 뒷담화는 외로움 키워드의 두 번째 텍스트 <가면의 고백>에 대해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글입니다.


*이번 모임엔 다희, 동석, 이주, 연연, 해정, 학곰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 <가면의 고백> 발제문 : 외로워도 슬퍼도 도취를 해보자'를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0. 책을 읽고


해정 : 옛날에 읽었었는데, 그때는 글이 굉장히 좋다고 느꼈었어요. 특히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했다는 점에서 놀라웠어요. 그런데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는 못느꼈던 여성혐오적인 맥락들이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전처럼 막 좋아하면서 읽지는 못했어요. 그래도 스스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좋았던 것 같아요. 제가 영화가 아니라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처음이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지, ‘외로움’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이 되었어요.


학곰 : 이전에 해정에게 두 번 추천 받았던 책이에요. 한 번은 읽다가 포기했고 이번에 다시 끝까지 읽었어요. 발제문을 보니 많이 주저하면서 썼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제가 느끼기로는 책이 ‘외로움’까지 닿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별로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물론 외로움에 대한 정의는 각자 다르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외로움은 <립반윙클의 신부>의 쿠로키 하루가 떠오르거든요. 남이 보기에 정상이라고 생각되도록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요. 이 사람은 디폴트로 ‘나는 정상이 아니다.’ 라는 게 깔려있어서 별로 외로운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외로움보다는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혔어요.


연연 : 저도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외로움’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주인공이지 자신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인식한 후에 외로움이 가능할 텐데 소설은 그 이전의 단계를 다루고 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외로움'과 연결시키기가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소설 자체는 흥미로웠어요. 동성애라는 주제를 다뤘다는 점도 좋았고요. 발제문도 잘 읽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부분은 과연 육체적인 호감으로부터 성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인지하는 부분이에요.


다희 :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키워드와 연결해서 읽으려다보니 주인공의 마음상태를 계속 주시하며 읽었는데, 학곰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이 정상으로 보이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오히려 자의식이 많아서 그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로움'보다는 스스로의 욕망을 알고 있고 그것으로 가득 차 있고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상태 같았어요. 당시 일본 소설의 흐름이기도 했겠지만 개인의 욕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신기했어요.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뤘다는 점에서는 최근 신작인 <여름, 스피드>와도 비교해서 읽어보고 싶어요.



1. '나'는 외로웠을까, 외롭지 않았을까?


해정 : 주인공의 자의식 과잉이 외로움과 닿아있다고 생각했어요. 외롭기 때문에 자기에게 더 집중하는 거죠.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나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잖아요. 자기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자의식 과잉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외로움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학곰 : 치열-욕망이 외로움의 반의어는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의식 과잉은 자기애가 좀 과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기 바라는 것 같은데, <립반윙클의 신부>는 자기혐오를 베이스로 하는 느낌이에요. 오히려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타인으로부터 자기를 발견하려고 하는거죠.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했을 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할까,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하면서 행동하는 거죠.


<가면의 고백>의 '나' 또한 비슷한 부분은 내가 이렇게 하는게 맞겠지를 생각하면서 행동한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그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서 치열하게 행동한다는 점이 달라요. 치열한 사람은 외로울 시간이 없다고 생각해요. 독자나 주변사람은 이 사람이 외롭다고 느낄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는 외롭다고 느낄 겨를이 없었을 것 같아요. 본인이 외롭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외롭지 않은 것 아닐까요.


해정 : 저는 그 의견에는 반대예요. 주인공은 오미가 눈이 쌓인 운동장에 이름을 크게 썼을 때 오미의 외로움을 느꼈었는데, 그 감정을 느껴본 사람만이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비정상성에 골몰하는 태도, 정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다가 또 미끄러지는 태도에서 이미 자신의 고독을 예감했기 때문에 오미의 모습에서도 고독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음...고독과 외로움은 또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학곰 : '나'는 자신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인지는 하지만 인정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사회 분위기상 그럴 수 없기도 하고 그래서 부정을 하는 것 같은데, 소수자로서의 외로움이 발현이 되려면 그것을 인정한 이후에 찾아올 것 같아요.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외로움이 발현되지 않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해정이 말한 장면은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당시 '나'는 애였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의 감정이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감성적으로 그런 시절이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이주 : 아니 그건 너무 청소년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 아닌가요?(웃음) 청소년의 감정은 소중합니다. 청소년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려보면 지금도 생생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부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희 : 자신의 욕망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학곰의 발언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외로움은 무엇인가로부터 소외감을 느꼈을 때 오는 감각인 것 같아요. 소설에서 '나'는 여자의 몸을 보면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남자의 몸을 보고 감정을 느끼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자각하게 돼요. 평범한 남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에서 오는 소외감을 느꼈는데 그 순간이 외롭지 않았을까요.


연연 : '외로움'은 나에 대한 느낌이고, '고독'은 세계에 대한 느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구나'라는 게 '외로움'이라면, '세상에 던져진 상태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고독'이랄까요. 그래서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체념으로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나'의 감정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체념을 별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나'는 체념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이 어느 자리에 위치할지를 고민했어요.


해정 : 체념이라는 부분이 없다고 했는데, 책 후반부에 나쁜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 친구와 가잖아요. 그 전에는 여성과의 관계를 상상으로만 접하고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도 실제 여자의 나체를 앞에 두면 정상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절대 비집어들어갈 수 없는 그 상황에서 체념을 느꼈다고 생각했어요. 소노코와 클럽에 가서도 남성의 모습에 끌리는 부분을 마지막에 묘사했는데, 그 부분도 체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고요.



2. 그렇다면 외로움은 도대체 뭐길래


이주 : 지금까지 '나'가 외로운지 외롭지 않은지를 계속 얘기했는데, 각자가 생각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가 다르다보니 '나'의 외로움에 대한 생각도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각자 생각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언제 외로움을 느끼는지를 얘기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학곰 : 저는 별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친구는 별로 없었지만 외롭지 않았어요.(웃음)


동석 : 저는 청소년 때 많이 외로웠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동네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부터는 다른 지역구로 학교 다녔어요. 하교할 때 같은 반 친구들은 걸어서 15분 정도 가까운 거리로 가는데 저 혼자 지하철 타고 30분 넘게 집까지 가야했어요. 친구들은 한 명 한 명 가고 텅 빈 아파트를 지나고 지하철엔 사람이 없고. 그 때 외롭다고 느꼈어요. 옆에는 다 타인밖에 없고 지금 나는 혼자라고 알게 되는거죠. 그러면서 혼잣말이 늘고, 생각이 많아지고...ㅎㅎ 지금도 혼자인 걸 감정적으로 자각할 때 외로운 것 같아요.


이주 : 저도 어릴 때 외로운 감정을 꽤 느꼈었어요. 그 때 왜 외로웠지를 생각해보면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다고 느낄 때 외로웠던 것 같아요. 공부하기 싫은데 공부해야 되고 제가 하고 싶은걸 못할 때...? 스무살 이후부터는 사람들과 잔뜩 있다가 집에 갈 때 외로움을 많이 느꼈어요. 술먹고 신나게 놀다가 집으로 갈 때요.


연연 : 저도 사람들과 있다가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운 것 같아요. 그때 느끼는 외로움은 이를 테면 이런 거예요. '나는 평생이라고 살겠구나. 같이 있다가 헤어질 때 외로움을 느끼고. 같이 있다고 무조건 전부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또 다른 사람을 찾으면서 계속 이렇게 살겠구나' 생각하면 외로움을 느껴요. 청소년 때는 여기까지는 닿지 못하는 것 같아요.



3. 사랑이 반드시 성적인 것이어야 하는가


이주 : <가면의 고백>을 읽으며 '나'와 소노코의 관계에서 사랑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되었어요. '나'는 소노코에게 성적인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지만 소노코와 편지를 주고 받고 보러가고 마지막에 결혼을 고민하기도 하는 부분에서 소노코에게 애정이 있다고 느껴졌어요. 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요.


해정 :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이지만, 저도 소노코와의 관계가 오히려 사회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위 드라마나 영화에서 말하는 운명이 아닐까요. '나'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성적 추동을 느낀다”는 것이 곧바로 사랑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해요. 아마도 제가 여자라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생물학적으로 남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성적추동과 사랑을 일치하는 경향과 그에 따른 고뇌가 이렇게까지 펼쳐진 것 아닐까요.


연연 : 섹스가 사랑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오는데 자본이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설명한 책 <사랑은 왜 아픈가>에따르면 이전에는 '섹스=사랑'이 아니었대요. 지금은 그렇게 결부되지 않은 시대를 살아온 적이 없다고 할까요. 저는 원래는 성적 충동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없는데 그게 아니라 배운 적이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느꼈어요. 아무래도 이 부분은 소설이 창작된 시대적인 배경과 서술자가 남성이라는 점과 뗄 수 없는 것 같아요. 여성을 종속시키고 재화로 상품화하는 남성의 관점에서 보다보니 소노코를 인간으로 대하는 법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다희 : 소설에서는 욕망하는 주체의 디폴트가 남성으로 한정되어 있어요. 여성들을 어떻게 도발해야 하는지 그런 장면이 나오고, 여성은 욕망을 표현할 수 없는 존재로 그려졌어요. 여성은 그냥 섹시한 것, 귀여운 것 등 대상으로만 그려지고 남성의 욕망은 위험하고 다루기 어렵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려진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조금 아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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