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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Sep 30. 2018

외로워도 슬퍼도 도취를 해보자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느슨한 빌리지에서는 "신"이라는 키워드에 이어 "외로움"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가면의 고백>은 "외로움" 3부작 중 두 번째 텍스트입니다. 




1. 가면의 고백과 외로움     

 주제가 ‘외로움’이다. 어떤 책과 영화가 있을까 하다가 결국 외로운 사람의 목소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이 떠올랐다. 제목부터가 “가면”의 고백이니까. 그것이 가면을 쓴 채로 한 고백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쓰고 있는 가면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인지. 두 가지 함의가 모두 담겨 있는 것이겠지만 특히 전자, 그러니까 ‘가면을 쓴 채로 하는 고백’이라고 생각할 때면 막연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가장 솔직한 거라고 이해되는 고백마저 ‘가면을 쓴 채로’일 수밖에 없는 어떤 상태가 돌연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나의 연기로 비치는 것이 나로서는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표현이었고, 남의 눈에 자연스러운 나로 비치는 것이 곧 나의 연기라는 메커니즘      

 ‘나’의 연기(가면)에 대한 고백 역시 가면을 쓴 채일 수밖에 없는 건, 그만큼 이 메커니즘이 의식적인 작동을 넘어 기계적인 작동으로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준으로까지 작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메커니즘 바깥의 ‘본질적인 나’는 상상으로만, 오직 상상으로만 향유할 수 있다는 것. 현실에서의 ‘본질적인 나’는 오직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 수치심 같은 것으로만 엄습해온다는 것. 나로부터의 철저한 소외. 이 이상 외로운 게 또 있을까. 자기 자신에게마저 소외된 사람에게 ‘고백’, 그러니까 은밀하고도 진실 된(것으로 이해되는) 목소리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다. 그 불가능을 함축한 제목 『가면의 고백』 은 그래서 유달리 ‘외로운 혼자’의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그래서 이번 주 책으로 선정했다.

  

 살이 달린, 혹인 살에 파고든 가면의 형상을 상상할 때면 무섭고 또 외로워지는 한편, 그것이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나’의 고백을 “우리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안일한 문장으로 무마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면의 고백』을 읽는 동안 느꼈던 소외감, 그것이 사회로부터이든 나로부터이든 ‘소외되고 있다, 그리고 영원히 소외될 것이다’는 감각은 우리도 어렴풋이 진즉에 겪고 있는 것이니까. ‘나’의 고백을 빌어 우리 안에 존재하는 외로움과 살처럼 붙어있는 가면을 조금 더 분명히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인식하면 뭐가 좀 달라지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오늘날 익히 자연스러운 ‘가면을 쓴 세상’과 ‘연기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더 커다래진 마음으로 직시할 수 있을지도.

 

책 정보와 간략한 줄거리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 외로움의 이유 

 ‘나’를 게이라고 볼 수 있는가? 6년 전, 처음으로 『가면의 고백』 읽었을 당시만 해도 명백한 성소수자의 이야기로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은 오리무중이다. 남자(오미)가 되기를 열망한다는 것만이 선명했다. 오미 같은(?) 남자들에게서 성적 충동을 느끼는 것 역시 일종의 ‘남자-되기’의 일환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을 향한 ‘선천적’ 욕망이 부재한다”데서 오는 짙은 열패감도 ‘나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것보다 ‘오미가 되고 싶은 나는 오미가 되는 일에 영원히 실패하는 수밖에 없다’로 읽혔다. 소설 전반에서 읽을 수 있는 여성혐오적인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사랑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일이 곧 육체적으로 발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로서는 (여자인 나는 애초에 그런 경험 자체가 없다) 그것에 천착하는 ‘나’의 모습을 두고, 이게 정말 사랑인가, 의심했다. 소노코와의 정신적인 교류 역시, 그것을 ‘사랑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다. 정리하자면, “육체적·성적 욕망이 있어야만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 내내 따라다녔다.  

    

 하지만 ‘나’가 삶을 살았던 때에, 육체적·성적 욕망은 사랑의 교류에 있어 거의 필수적인 조건이었을 테니까.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적 욕망이 부재한 사랑’에 대한 상상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소노코와의 관계를 사랑에 가깝지만 결코 사랑은 아닐 것이라 정의 내렸던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내 사랑과 그 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섣불리 그것을 사랑이 아니라거나, 그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각자에게 사랑의 모양과 방식은 제각각일 것이고, 그 대상 역시 제멋대로일 것이다. 그렇게 사랑에는 으레 보편적인 모습과 합의가 존재한다는 거짓을 거두고 나면, 주인공이 그래서 게이인지 아닌지는 중요해지지 않고, 그저 보편이라 여겨지는 것과는 다르게 나아가는 자신의 충동을 두고 고뇌하는 한 개인만이 분명해진다. 어쩌면 결코 당연하다거나 자연스러울 리가 없는 ‘보편’이 개인을 소외시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보편에 아무런 의심 없이 복무하는 태도야말로 내 주위뿐만 아니라 나 자신마저 나락으로 밀쳐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의 사전적 정의는 ‘혼자가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이라고 한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부분은 아마도 ‘혼자가 되어’에 있을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혼자가 아닐 때가 있었다는 것. 다시 말해, 모난 데 없이 다수가 복무하는 보편에 속한 때가 있었다는 것. 거기서부터 떨어져 나오는 때, 그러니까 의심과 질문이 시작되는 때부터 인간은 어쩔 도리 없이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그 의심과 질문은 또 바깥을 향해 무작정 내뱉을 수는 없는 거라서, 보편에 복무하는 가면을 쓴 채로, 저 혼자에게로만 내뱉는 의심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심은 종종 나 자신을 송두리째 의심하는 모양이 되기도 할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만 같은 때,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3. 나에게 도취하는 일        

 '자아도취', 혹은 '자의식 과잉'이라는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이해된다. 자신에게 스스로가 너무도 비대해서 그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 (혹은 않는 것) 그리고 나와 나 바깥의 것을 쉬이 편집해버리고 오독하는 태도 같은 것. 하지만 내 주변이 없고 오직 나 혼자만이 선명할 때, 혹은 그런 나 혼자마저도 위태로울 때. 그러니까 외로울 때. 그런 이가 가지고 놀 수 있는 건 ‘나 혼자’일 따름이다. 결국 ‘나’는 남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이 태어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가면의 고백』, 그 내용이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로 점철되어있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선명한 것이 나를 놀라게 하고 안타깝게 하고 내 마음을 까닭 모를 괴로움으로 가득 채웠다. 그것은 미코시를 멘 젊은 이들의, 세상에도 외설스러운 너무도 노골적인 도취의 표정이었다…… (38~39p)
 나는 눈 위에 그려진 거대한 그의 이름 OMI를 본 순간, 그의 고독을 구석구석까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해했다. (63p)     


 ‘나’가 어린 시절 ‘도취의 표정’에 유독 시선이 머물렀던 것, 거기에서 어떤 괴로움과 안타까움을 느꼈다는 부분은 ‘자기에로의 도취’에 내포된 ‘혼자’라는 감각을 어렴풋이 알게 한다. 오미가 직접 눈 위에 적어내린 ‘OMI’라는 글씨를 본 순간, '나'가 오미의 가면과 그 가면 속의 고독을 이해했다는 내용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면의 고백』은, 타인에 대해 말하더라도 그 문장들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로 향한다. 타인이 내게 미친 반향들과 그 반향들에 대한 나의 생각 같은 것으로. 우리는 책을 읽는 내내 비대한 나와 그 주변으로는 무엇도 무마되기 일쑤인 풍경만을 볼 수 있다. 그게 부담스럽거나 버겁지는 않은 건, 그 비대한 스스로를 정말이지 그대로 직시하고 탐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이라고 이해되는 것)’을 오가는 스스로를, 외면하면 실로 편해질 그 간극과 모순을 그대로 전시해버리는 ‘나’의 글을 ‘자의식 과잉’으로만 이해하긴 어렵다. ‘과잉’이라기엔 오히려 침착하고 서늘한 데가 있다. 자기에로의 치밀한 도취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무서우리만치 적나라한데다 치밀하기까지 한 주인공의 목소리는 어쩌면 가면을 쓴 자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안과 밖 사이에 저만치의 거리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그 기나긴 거리가 곧 본인의 살과 몸이 되어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나라면 바깥으로만 내달리는 데 급급했을 그 거리를 그대로 직시하는 자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같은 고백이 가능하기까지 바깥의 방향으로, 그러니까 ‘비록 그것이 무너지기 쉬운 붉은 흙의 조그만 구덩이라 해도, 어찌되었든 ‘죽음’이 아닌 것 쪽으로 내달리는’일을 숱하게 반복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 소설의 두께와 무게감이 절로 더 커다랗게 엄습해오는 듯하다. 그 무게를 버티는 일에도 나름의 체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적나라한 고백을 마주보는 것에도 힘이 필요한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주인공은 죽으려는 마음도 없으면서 쉬이 내뱉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런 내 마음을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 곧이어 그것을 선뜻 고백해버리는 ‘나’의 목소리를 마주하곤 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로 도취해있되, 그런 스스로마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자의 글과 내용이 서늘했고 (진심으로) 무섭기까지 했다. 나의 편견과 막무가내의 생각들을 적나라하게 들킨 기분이었다. (가면을 쓴)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글은 읽는 이의 가면마저도 적나라하게 비추는 건지도 모른다.        




4. 고백과 위로

 그것은 패전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내게는, 단지 나에게만은 무서운 나날이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를 부르르 떨게 만드는, 게다가 절대로 찾아오지 않은 거라고 자신을 속여왔던 인간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이 이제 어쩔 도리 없이 내일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었다. (193p)    


 내가 그의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위 단락으로 아주 잠깐은 상상할 수 있었다. 일상이 전쟁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그 모르는 삶을.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내게 불가해한 나의 것들, 그러니까 흔히 무탈하다고 생각되지만 균열일 따름인 일상의 어떤 순간들과 그것의 버거움이 돌연 ‘이해’의 영역에 자리하는 느낌이었다. 설명할 수 없던 것들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그대로 두어도 된다는 어떤 힘 같은 게 생긴 것 같았다. 균열을 애써 메우려들지 않아도 괜찮다는 일종의 낙관(?) 같은 것을 얻은 것이다. 타인의 고백과 그 안의 고통은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에게 위로가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나는 이 ‘위로’라는 말에 이상한 거부감이 있다. 게다가 ‘나’는 오직 절망만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선뜻 그것을 취해 낙관을 얻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건 너무 제멋대로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의 삶(가면)에 대해 우리는 모르고 각자가 수행하는 삶, 그 안의 모양도 우린 모른다. 모르는 것이 만연한 지금이기 때문에 소외와 외로움은 우리 모두에게 선연히 존재하는 것일 테다. 제각기 그 모양은 다르더라도 스스로에게는 절대적인 무게와 질량을 지니고 있을 외로움, 그리고 소외감. ‘우리 모두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고로, 우리 모두는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타인의 외로움과 고독을 알았다고 해서 나의 외로움과 고독이 무마되는 것도 아닐 테고, 보통이 되는 것도 아닐 테니까. 설령 보통이 된다한들 그 ‘보통’이란 게 곧 ‘괜찮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없다. 보통은 보통인 대로 어쨌든 괜찮지 않은 것이다.


 결국 여기에 명쾌한 해답이나 탈출구는 없다. 그저 이 소설의 결말, 그 내용처럼 ‘텅빈 의지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덩그러니 놓였고, 탁자 위에 흘러내린 음료수가 번쩍번쩍 무시무시한 반사광을 뿜고 있’는 미완결의 풍경만이 반복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대체 뭘 어쩔 수 있고 또 어쩌자는 것일까. 외로움과 소외가 없는 상태는 이제 상상할 수가 없는데, 그게 괜찮아질 수도 없는 거라면. 29살의, 아직 스스로의 삶도 제대로 꾸려본 적 없고, 그래서 앞으로도 그럴싸한 삶이나 성공과는 아주 멀리 내가 이 글의 말미에 적을 수 있는 거라곤 이런 것뿐이다. 탈출구가 없기 때문에 결국 외로움과 부대낄 수밖에 없는 거라면, 제대로 부대끼는 것 역시 하나의 방도일 수는 있지 않을까하는, 참 뻔하고 볼품없는데다가 게으르기까지한 문장…. (ㅠㅠ)  

     



 여기에 만연한 가면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자 애쓰는 것. 그렇게 ‘몰라도 된다’거나 ‘애써 상상해볼 필요도 없다’는 마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 어떻게든 상상해보려는 마음을 천천히라도 획득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가면과 그 안의 살과 어떤 얼굴과 어떤 표정이 (가면의 모양과 같거나 완전히 다르거나 어쨌든) 있을 거라는 상상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구원이라 함은 결국, 외로움을 극복하는 힘이 아니라 그 외로움에도 결코 무너지지는 않을 힘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외로움에 치밀하게 도취해보는 것이다. 그것에 도취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외로움을 알고 또 직시하여야 할 것이고, 바깥을 서성이는 숱한 고백과 그 안의 외로움을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침묵 속을 배회하고만 있을 어떤 목소리도 짐작하며 잠깐은 상상해야 할 것이다. 그건 외로움과 관련된 모든 촉의 고삐를 풀고, 그것이 제멋대로 날뛰게 두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물론 “모두가 외롭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다. 그것만큼 무책임하고 제멋대로인데다가 불쾌하기까지 한 상상이 없다. 그 문장으로부터 함부로 위안을 얻는 것 역시 다소 끔찍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는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니까. ‘정상’이라는 범주로부터 아득히 먼, 도저히 괜찮아지지 않는 나와 당신이 있다는 걸 직시하는 일.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이 아주 중요하고 또 필요하니까


 그런데 타인의 삶과 고백, 그리고 그 안의 외로움으로부터 어떤 힘을 얻는다는 것이 겸연쩍고 부끄러운 일이다. 타인의 선연한 고통을 앞에 두고 나의 고통에 골몰하는 일은 더욱이.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을 두고 나의 고통 쯤은 괜찮다거나, 나보다는 낫다는 식의 위안이나 절망을 얻는 건 너무 이상하고 무서운 일이 아닌가. 자기 바깥의 것을 안으로 끌어당기는 이 도취는 조금 징그러운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의 고백』의 주인공이 행하는 도취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이 사람한테는 온통 자신의 고통뿐인데도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힘이. 그게 종이 바깥의 내 삶으로까지 닿곤 했다. 어쩌면 자기에게 도취하는 일. 그러니까 자신의 외로움과 소외감, 그리고 가면에 골몰하는 일이 꼭 자기 이외의 것을 갈취하는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나 바깥의 것을 잡아당기기만 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어떤 도취의 삶과 문장들은 바깥으로 튀어나가고 또 단단해져서 자기 이외의 것을 지탱하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가면의 고백』으로 어렴풋이 짐작해볼 수 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외로움이 만연한 이때에 우리는 숱한 가면들―그러니까 나와 타인의 삶에 도취해보는 수밖에. 나의 것을 통해 나와 타인의 것을 보고, 또 타인의 것을 통해 나와 타인의 것을 보는 이 관계 속에서 서로다 가진 힘이 바깥으로 향할 수도 있다. 그 힘이 서로를 지탱할지도 모른다. 그럼 ‘외로움’은 괜찮아질 수는 없을 테지만 부대끼며 살 수는 있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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