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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Nov 14. 2018

내게는 부동산이랄 게 없지만요

34. 영화 <초행>

  

*느빌의 책장의 발제-녹취가 개편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 11월의 주제는 [공간] 입니다!


*11월 주제 [공간] 업로드 일정표

- 11월 7일(수)    『서울선언』, 김시덕(2018)

- 11월 14일(수)   「초행」, 김대환(2017)

- 11월 21일(수)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2018)

- 11월 28일(수)   「고양이 케디」, 제다 토룬(2017)



 


이번 달 주제가 공간이다. 내 차례는 영화였다. 공간, 공간…? 하다가 영화 <초행>이 떠올랐다. 영화 <초행>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서울과 인천과 삼척을 오고 간다. 그 궤적을 공간이라는 주제로 풀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여튼, <초행>은 작년 12월에 봤던 영화다. 길게 연애한 남자와 여자가 아웅다웅하면서 흐르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 가보는 길, 또는 처음 살아보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조금 살아봤는데도 모르겠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 공간에 대한 얘기를 꺼내놓더라도, 그건 결국 삶에 대한 얘기로 흐를 것 같다.



영화 <초행>의 주인공들



▼ 영화 <초행>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링크로




희미한 공간


영화 <초행>에서 지영과 수현은 이사를 준비 중이다. 영화의 첫 공간으로 등장하는 그들의 집은 상자가 한가득이다. 짐만 가득인 집이라서 두 사람이 여기로 이사를 와서 어떻기 살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카메라는 집을 넓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이 공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모른다. 부엌의 조금, 방의 조금. 이런 식으로 자잘하게만 짐작할 수 있는 정도다. 집 전부를 볼 수 없다는 것. 그건 좁다, 복잡하다, 답답하다, 뭐 이런 식의 느낌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초행>이라는 가상의 이야기 안에 그 느낌들을 새긴다. 이 느낌들은 곧 지영과 수현의 감정 같은 것이 된다. 그걸 우리도 어렴풋하게 느낀다. 그리고 ‘지영과 수현은 거기에 아주 잠깐 머무는 사람이다’는 인상이 영화 전반에 새겨진다. 그들이 언젠가는 악착같이 꾸몄을지도 모를 공간을 우린 모른다. 어떤 공간에 대한 애틋함, 끈질김을 알기 어렵다. 영화 <초행>에는 ‘삶으로서의 공간’은 희미하다. 지영과 수현에게는 부동산이랄 게 없다.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랄 게 없다. 기껏 주차를 해놔도 딱지가 붙기 일쑤다. 마음 놓고 정박할 데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만치라도 살기 위해 계속 이사를 한다. '삶으로서의 내 집, 내 공간'을 포기한다. 지영의 부모가 사는 방식처럼 말이다.    





이렇게 ‘삶으로서의 공간’이 희미하다는 것. 변하지 않는, 오롯한 자기만의 것이 없다는 것. 이만치 살기 위해서라도 삶으로서의 공간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 정박할 곳이 없다는 것. 이건 곧 지영과 수현의 삶, 그 모습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건 없다. 직장도, 앞으로 무얼 할지도 막연하다. 어디를 갈 때도 둘 만으로는 안 된다. 내비게이션의 지침이 있어야 한다. GPS가 고장 나면 차를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를 모른다. 내가 있는 곳과 내 주변을 나는 모른다. '요즘 세대'의 삶이라고 하기엔 누구나 겪고 있는 삶 같다.           




카메라는 어디론가 이동하는 지영과 수현의 뒷모습을 본다. 덕분에 우리는 두 사람의 앞에 있다가 뒤로 지나가는 공간을 본다. 계속 흐르는 공간을 본다. 움직이지 않는 ‘내 것’이랄 게 없는 삶이니까, 매번 지나가기 일쑤인 공간은 자연스럽고 또 당연하다. ‘초행이라서 두렵다’이라는 감각은 정말 물리적으로 처음 가는 길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공간은 언제나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에, 사람은 어디서든 언제나 초행이다. ‘초행이라서 두렵다’는 마음은 매 순간 있다.      





희미해서 조용한 공간


두려운 일에 대처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침묵이다. 선뜻 대답하지 않는 것. 선뜻 표현하지 않는 것. 그건 도망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겁한 모습이기도 하다. 생리가 늦는다는 지영의 말에 자리를 뜨는 수현의 모습처럼. 생리를 않는데, 정말 기면? 엄마의 질문에 자리를 뜨는 지영의 모습처럼. 두 사람이 평소에 나누는 대화도 비슷한 모습이다. 임신이라든지 결혼이라든지 미래라든지. 언젠가는 말해야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피해야 하는 주제들이 그들에게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는 침묵이 촘촘하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나누는 대화에는 원래 침묵이 만연하다. 영화 <초행>은 어떤 이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다. 그러니까 침묵이 만연 할법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영과 수현 사이의 침묵은 유난한 데가 있다. 태평하다거나 편안하다기보다 삐죽거리며 모난 데가 있다.





이 모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후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지영과 수현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더래도, 둘이 처한 상황이 바뀐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고구마(!)는 두 사람이 겪는 불안이랄지, 두려움 같은 것을 타파할 방법이 마땅치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영화가 두 사람이 겪는 무엇에 해답을 던졌다면? 그 해답이 설령 감독이나 영화의 주관적인 시선이라 할지라도 영화 전반의 분위기는 무너졌을 것이다. 문제적 상황은 희미하다는 건데, 해답만이 선명하면 그건 좀 이상하니까. 이 지점은 누군가에겐 답답하거나 허무한 지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조심스러우면서도 완고한 시선으로 다가올 것이다.


뭐, 그런 문제-해답을 떠나서 영화 <초행>은 마지막까지도 선명하게 내보이는 게 없다. 그래서 임신을 한 건지, 결혼을 할 생각이 있긴 한 건지, 대학원은 잘 갔는지, 정규직은 됐는지, 심지어 이사를 잘 가긴 했는지. 이 모든 것에 끝까지 공백 처리를 한다. 두 사람의 공간은 여전히 희미하다. 대신 어디로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채로 계속 걸어가는 두 사람이 있다. 보는 사람으로서는 카타르시스라는 걸 느끼기 어려운 영화다. 두 사람에게 들이닥칠 시간에 대해 태평하게 낙관하기도 어려운 영화다. 그런데 나는 왜 영화 말미에서 웃음이 나왔을까. 왜 나는 삼척의 이른 아침 장면에서부터 '선명해지는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을까.




희미한 공간과 분명한 시간    


많은 영화들은 공간을 쉬이 나눈다. 한 공간이더라도 잘게 쪼갠다. 풀샷, 미디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 화면 안에 있는 사람의 크기에 따라 공간도 달라진다. <초행>은 조금 다르다. 시간이 아주 달라지는 게 아니라면, 한 공간을 나누지 않는다. (공간이라기보단 순간 혹은 시선이 더 맞는 표현일까. 여튼) 움직이는 카메라여서 공간이 쉬이 달라지긴 하지만 그 공간을 여러 컷으로 잘게 쪼개진 않는다. 어떤 한 때를 꽤 질척이며 끈질기게 응시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 본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마냥 부유하는 인물을. 침묵도 했다가 째려도 봤다가, 결국에는 얼굴을 맞대고 또 사진을 찍는 순간 대부분을.     





공간이 희미한 대신 영화 <초행>에서 선명한 게 있다. 분명하게 쌓여서 단단해지는 시간이 있다. 영화 <초행>은 할 수 있는 만큼 시간을 압축하지 않는 영화니까. 우리는 <초행>을 보며 새삼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근데 그게 마냥 무심하게 사람을 지나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게 사람에게로 흘러 뭐로든 쌓인다는 것을 보게 된다. 뭐 확실할 게 없는 삶인데도, 확실하게 쌓이는 게 있다는 걸 예감하게 된다. 떠오르는 해를 뒤로하고 찍은 사진이라든지. 식탁 위에 있는 커다란 무라든지. 나란히 걸으며 부대낀 어깨라든지.


그런 자잘한 시간들은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일 수 있을까. 겨우 고만한 것들이? 그런데 고작뿐인 그게 불확실한 것들 투성인 내게 거의 확실한 거라면. 나와 상관없이 물러지기 일쑤인 공간 위로, 간신히 새겨 넣을 수 있는 거라면. 고작뿐인 그것을 쌓아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 너무 무서워!


감정을 말로 뱉고, 타박하듯 원망하는 소리도 내보고, 그러다 사진을 찍고, 운전을 하고, 거리를 걷고. 하필 걷는 곳이 시위장소라면 2개에 3000원인 촛불도 들어보고. 그렇게 공간은 내내 희미하더라도, 희미한 공간을 지탱하는 사이 내 안에는 분명 시간이 쌓일 것이다.         






100세 시대라는데, 앞으로 수십 년이 흘러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하게)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나는 움직이지 않는 무엇을 소유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내 주제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생각한다. 그래도 내 안에 시간은 쌓인다는 생각을 한다. <초행>의 지영과 수현이 설령 헤어지더라도 둘에게 있었던 시간은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은 남는다 분명하게. 그러니까 어차피 공간이라는 게 지나가고야 마는 거라면, 선연히 지나가 보는 일도 나쁘지 않을지도. 신발끈을 단단히 동여매고서 말이다. 눈길 속에서 두 사람이 자동차 바퀴에 체인을 단단히 동여맸던 것처럼. 그럼 설령 비틀대더라도 아주 엎어져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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