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홍성수의 『말이 칼이 될 때』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 12월의 주제는 [혐오와 연대]입니다!
- 12월 5일(수) 『민트의 세계』, 듀나(2018)
- 12월 12일(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장 마크 발레(2013)
- 12월 19일(수) 『말이 칼이 될 때』, 홍성수(2018)
- 12월 27일(수) 「런던 프라이드」, 매튜 워처스(2014)
※ 이 글에는 예시로서 성소수자 혐오표현이 조금 등장합니다. 글을 읽고 싶지 않으신 분은 건너뛰어주세요.
지난 11월 공중파 방송사 KBS에서 공식 사과를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엄경철의 심야토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성소수자와 차별금지법' 을 다루면서 일부 토론자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며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 발언을 하여, 패널과 의제를 부적절하게 구성한 KBS를 향한 질타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KBS, '엄경철의 심야토론' 동성애 혐오 발언 사과", "KBS, 차별금지법 토론에 성소수자 반대 단체 패널은 문제")
본래 차별금지법 찬반에 대해 논의되어야할 자리에서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인지 등의 의제를 다루는 난장판(..)을 보며, 나는 이 책을 떠올렸다. "인권은 존중하지만 반대하는 것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거나 차별금지법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반대측 패널에게 필요한 책, 홍성수 교수의 『말이 칼이 될 때』이다.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라는 부제로 설명된다. 법철학자이자 법사회학자인 저자가 그 동안의 연구를 토대로 혐오표현의 정의와 유형, 문제점을 살피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제안한다.
혐오표현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혐오의 뜻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혐오는 단순히 '싫어하고 미워함'이라는 일상적, 사전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24쪽)"를 뜻한다. 그러니까 '여자를 좋아하는데 왜 여성혐오죠?'라는 질문에는 '여성을 좋아하는 태도가 차별적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혐오표현은 혐오라는 태도를 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일이다. 혐오표현은 영어 헤이트 스피치hate speach의 번역어인데, 이때 스피치는 말뿐만 아니라 나치 문양이나 일베 손모양과 같은 상징물, 복장, 퍼포먼스 등을 모두 포함한다. 『말이 칼이 될 때』는 국제법을 통해 혐오표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혐오표현 :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하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 (31쪽)
여기서 필수 요소는 소수자, 차별, 표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김치녀'는 혐오표현이지만, '한남'이나 '개독'은 혐오표현이 아니다. '김치녀'처럼 의도와 무관하게 대상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고 이미지가 사실로 둔갑해 그 존재를 차별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차별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남성과 기독교가 다수자라는 점도 결정적이다. 소수자처럼 차별받아온 경험이 없기 때문에 특정한 말이 일상적인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 기독교가 소수자인 이슬람 사회라면 '개독'이 혐오표현이 될 수도 있다.
혐오표현은 차별적 괴롭힘, 편견 조장, 모욕, 증오선동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앞의 두 가지는 객관적인 척 거짓을 사실화하고 뒤의 두 가지는 노골적으로 차별한다(이건 내 의견이다. 저자의 의견과 상관 없다.) 퀴어 퍼레이드에 가서 마주치는 "동성애는 인류 생명 질서를 무너뜨려 사회를 망친다"는 말은 편견 조장이고, 동성애자를 "똥꼬충"이라 부르는 말은 모욕인 셈이다. 실제로 최근 퀴어퍼레이드에서는 기독교 단체가 거짓 뉴스를 배포하여 동성애 혐오를 조장한 사건도 있었다. (관련 기사: "퀴어 축제 트럭이 목사 덮쳤다? 또 개신교발 가짜 뉴스") 어느 쪽이든 기분 나쁘고 실제로 나쁜 영향을 끼치기는 마찬가지이다.
누군가는 때리는 것도 아닌데 말하는 수준의 표현이 무엇이 문제냐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부럽다. 말로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일 테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한번쯤 말 때문에 큰 상처를 받는다. 소수자에게 혐오표현은 상처 이상의 해악을 미친다.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책에서 한 이주민은 전철에서 '니네 나라로 가'라는 말을 듣고 '여기가 내 나라인데요'라고 답하면서도 '내가 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나', '전철서 내려야 하나' 등의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이런 경험이 쌓여 한국에서 살기 싫어지기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착취당하기 싫어도 현실적 조건에 매여 직장에 다니듯이, 소수자에게도 싫다고 떠날 선택지는 없다. 그런데 혐오표현은 소수자가 계속해서 긴장감과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일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도록 만든다. 실제로 다수의 소수자가 혐오표현으로 인해 이사, 이민, 사직, 이직, 중퇴, 전학, 휴학 등 일과 학업에 지장을 받았다고 한다(79쪽). 이쯤되면 혐오표현과 짝지어 언급되는 표현의 자유는 더이상 반대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점을 깨닫는다. 생존권과 표현의 자유, 어느 쪽이 먼저겠는가?
또 다른 이유는 확산과 심화이다. 혐오표현은 차별을 재생산하여 넓이 축으로 확산시킬 뿐만 아니라 높이 축으로 심화되어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편견을 갖고 있다고 모두가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곁에 있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면? '말해도 괜찮네'라고 생각하고 혐오표현하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다. 한편, 역사적 경험과 혐오조직 연구에 따르면 혐오표현은 실제 차별 행위로, 실제 차별 행위는 표적 집단을 향한 물리적 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러한 폭력을 증오범죄hate crime이라고 부른다. 책에서는 이를 '혐오의 피라미드'로 설명한다(사진 참고).
이러한 해악이 해악인 근본적인 이유는 첫째, 모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침해하고, 둘째, 사회의 다양성을 위협한다. 현재 시점에서 보자. 특정 집단이 혐오로 사회에서 몰려났을 때, 나머지 집단 또한 자신도 몰려날 수 있다는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이는 사회의 안정성을 위협한다. 미래 시점에서 보자. 역사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선 다양성이 필수적이었다. 하나의 특성만을 가진 집단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었다. 도태가 나쁘지는 않지만, 나만 살고자 다같이 죽자는 건 어리석지 않은가.
『말이 칼이 될 때』 후반부에는 〈엄경철의 심야토론〉에서 보여주어야 했을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를 이어간다. '차별금지법'은 국가법상으로 혐오표현을 규제 대상으로 삼는 법이다. 홍성수 교수는 그 기원을 1948년 선포된 세계인권선언에서 찾는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며,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위배되는 그 어떤 차별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러한 차별에 대한 그 어떤 선동행위에 대해서도 똑같은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세계인권선언 7조)
차별뿐만 아니라 차별에 대한 선동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흐름은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겪은 북서 유럽 국가들로부터 시작되어 최근 혐한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에서까지 차별금지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본국(일본) 외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위한 대책 추진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제정 촉구 청원과 제정 반대 청원이 함께 올라온 상태이다.
일각에서는 나라의 규제를 최소화하려는 미국을 가리키며 우리나라의 현실이 뒤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나라법이 아닌 기업문화 등으로 "형사 규제를 제외한 거의 모든 규제를 시행하고 있(139쪽)"다. 다양성 정책을 시행하는 기업 리스트를 채용 정보로 제공하는 일이 그 예이다. 책에서는 전자와 후자를 유럽식 접근: 규제 찬성론, 미국식 접근: 규제 반대론으로 정리한다.
하지만 책이 제시하는 대응책은 제3의 길이다. 표현의 자유를 증진하는 개입. "희생자와 그 지지자들에게 혐오표현행위에 대응하게 하는 실질적, 제도적, 교육적 지원을 함으로써 희생자들로 하여금 혐오표현행위의 '침묵하게 만드는 효과'에 도전하게 하고, 혐오표현 화자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151쪽) 혐오표현을 형사범죄화하더라도 그 범주에 속하지 않는 혐오표현은 다른 방법으로 규제해야 하며,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다른 조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면 '금지하는 규제' 대신 '지지하는 규제' 쪽으로 나아가자는 입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대에서 벌어진 성소수자 환영 현수막 파손 사건이다.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모두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간밤에 찢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보다 놀라운 건 학생들의 대처였다. 현수막 옆에 반창고를 쌓아두고 지지하는 마음을 반창고를 붙여 표현해달라고 한 것이다. 수많은 학생이 이에 참여하였고, 범인을 처벌하는 일과는 또다른 연대로서의 상황 전복을 이루어냈다.
꼭 이러한 퍼포먼스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소수자의 권력 위치를 바꾸어 말하기만 해도 혐오표현에 대응할 수 있다. '비성소수자'라는 말처럼. 개인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대응 표현은 '성애적'이라는 말. 섹슈얼한 맥락을 '이성적 매력'이 아닌 '성애적 매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나 혼자 고민한 표현이라 적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일 무렵, 한 후보는 당당하게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다른 후보는 동의하지는 않지만 차별해선 안 된다고 말하여 큰 화제였다. 후에 사과를 하기는 했지만, 공중파 방송사나 공인처럼 대중에 대한 파급력이 큰 매체 또는 인물은 물론 우리 개인도 스스로의 검열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소극적인 연대이자, 연대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