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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24. 2019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43. 리처드 링클레이터, <보이후드>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1월의 주제는 [성장]입니다!

*이번 녹취는 짧게 진행되어 발제와 함께 업로드합니다.


*1월 주제 [성장] 업로드 일정표

- 1월 9일(수)  「위플래쉬」, 데이미언 셔젤(2014) - 지각하였습니다

- 1월 16일(수)『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2018) - 저도 지각하였습니다

- 1월 23일(수)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2014) 

- 1월 30일(수)  『폴리나』, 바스티앙 비베스(2018)



내 맘대로 될 리가 없지

큰일이다. 새해엔 무언가 더 바지런히,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다. 그래서 연말을 약간은 몽롱하게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정돈되어 있지 않아 불투명한 나의 하루하루가 명료해지길 기대했다. 그렇게 기대하며 하려던 것들의 계획을 새해 이후로 미뤄두었으니까. 일단 그때가 되면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미뤄두고 기대했다. 


미래의 나를 기대하는 것. 생각해보면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만 되면, 이 시기만 지나면, 이것만 이루면, 이것만 가지면, 다 될 것 같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삶은 그렇게 생각대로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오늘의 영화 <보이후드>는 그러한 삶의 우연성을 아주 계획적이고 집요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영화 속에 담긴 소년의 성장기는 실제 12년의 시간을 보내며 담아낸 것이다. 영화 속에서 15분가량씩 보여지는 시간을 위해 매년 1주일을 같은 배우들이 연기했다고 한다. 시나리오 또한 주인공의 변화에 맞춰 계속 수정되고 편집되었다. 특이한 제작 방식 덕분에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도 많은 편이다. 메이슨의 누나 역할을 연기한 사만다 역의 배우는 실은 감독의 친딸이었다. 어린 시절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후엔 본인 분량을 축소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렇게 12년 간의 긴 프로젝트엔 크고 작은 변수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우연한 변화들을 맞춰가는 제작 방식 자체가 곧 이 영화에서 말하는 삶과 성장의 속성에 닿아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시간들을 지나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냐?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 답을 아는 사람은 없어.
그냥 최선을 다할 뿐.


모든 일들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묻는 메이슨에게 아빠는 말한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그러나 곧 그는 말을 바꾼다. 그래서 타이밍이 맞았다 한들,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어쩌면 인생은 지나고 보면 다 이해될 일들이지만 당시엔 아무리 애를 써도 이해되지 않는 그런 일 투성이다. 


나 또한 어떤 선택들을 하면서(혹은 선택에 내몰리며) 정확한 답을 알았던 때는 없었다. 오히려 의미를 알고 있다거나 알아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때때로 잘못된 곳으로 이끄는 것 같았다. 그 강박은 선택의 기로에서 나를 지나치게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이 선택이 내 삶을 크게 바꿀 것이라는 생각은 실수하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고 그러자 작은 실수에도 취약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점점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선택에 대한 불안은 더욱 커진다. 성장하고 있다고(또는 있어야 한다고) 의식할 때 오히려 성장은 더딘 것 아닐까. 그냥 조금은 힘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인생이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다만 그게 내 기준이나 계획에서 벗어났을 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그 안에서 실마리를 찾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마 성장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생기고, 헤매는 시간들이 더 많을 것이다. 무엇이 나아지고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도통 실감이 나지 않는 시간들을 보낼 때가 더 많겠지. 다만 과거의 순간들이 나도 모르게 저마다 쌓여 내가 되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보이후드>에서 알 수 있듯 그건 마냥 예쁘지도 않고, 그럴싸하지도 않을 것이다. 우린 종종 어떤 순간들을 선택하며 산다고 믿지만 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믿을 뿐이다.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해 지나온 시간들은 생각보다 길고 긴 날들이었고, 앞으로도 시간은 흘러가겠지만 넉넉하게 존재할 것이라는 걸.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대학생이 된다고 뭔가 확 변할 거 같진 않아. 

나도 변화는 기대 안 해. 그냥 삶의 단계지.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일뿐, 이게 미래의 열쇠는 아냐. 우선 우리 엄마를 봐. 학위도 땄고 좋은 직업도 있고 돈도 벌지만… 우리 엄마도 나만큼 헤매면서 산다는 거지. 


한편 영화에선 삶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을 순간들은 보여주지 않는다. 치열하게 노력하는 순간들이나 첨예한 갈등과 대립이 예상되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많이 보여주지 않는다. 인생 전체를 두고 큰 영향을 미쳤을 것 같다고 예상되는 상황은 부러 피한 듯이 편집된 느낌이다. 


예컨대 메이슨의 엄마가 홀로 육아를 하면서 교수가 되기까지의 학업을 찬찬히 밟아가는 과정은 지독하고 어려웠을 테지만, 모든 일들이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거기 있었을 뿐인 것처럼 비친다. 몇 번의 재혼과 이혼, 그리고 이사와 같은 사건들을 더 자세하게 보여주었다면 아마 우린 그것에 집중해서 메이슨의 성장을 해석하려 했을 것이다. 그의 성향, 성격, 진로 등을 이해하며 특정 사건들을 연결 짓게 되었을 것이다. 


12년의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의 죽음이나 극적인 사건 사고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별한 비극, 대단한 조력자, 천재적인 재능, 절호의 기회.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 성장담은 일종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 이젠 더이상 뭔가 확 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미루고 기대하고 싶지 않다. 생각보다 별 게 없을 수 있다. 보통의 아이었던 어린 내가 자라 내가 되었고, 시간이 지나서도 결국엔 나일 것이다.



그런 말 자주 하잖아.
이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근데 난 거꾸로인 것 같아.
우리가 순간을 붙잡는 게 아니라,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려 마음먹었더니 홀가분하다. 언젠가 나는 '인생에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단' 말보단, '지나 보니 다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는 말을 할 수 있고 싶다. 과거에 놓쳤던 기회 혹은 사람들에 대해 후회하는 것보단, 그 모든 과정 속에 존재하던 소중한 것들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인생에 나를 포기하면서 까지 이뤄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믿거나 '무언가'는 반드시 나아져야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싶지 않다.



P.S. 아 역시 너무 안일한가 싶어 또 흔들린다. 하지만 이렇게 헤매는 것도 나의 모습이니 괜찮다고 믿어본다. 야망은 적더라도 내가 뭘 할 때 행복한알고, 손에 게 단촐해서 언제든 도망칠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럼 어디서든 나는 나일 테니 금세 또 행복해질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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