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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Mar 23. 2019

'세대 갈등'으로 퉁치는 '꼰대'와 '요즘 것들'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수요일 발제 / 월요일 녹취가 업로드됩니다.

*3월의 주제는 [노년]입니다.




0. 아버지와 아들. ‘꼰대’와 ‘싸가지’


러시아 작가 이반 투르게네프가 쓴 소설 <아버지와 아들>은 겉으로는 세대 갈등을 날카롭게 그려내지만, 동시에 그 '세대 갈등'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폭력적인 프레임인가를 얼핏 자백하기도 한다.


소설에서 작가가 갈라놓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과 구분은 꽤나 선명하다. 파벨 키르사노프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는 자유주의, 귀족주의, 낭만주의라는 가치를 표방하고, 개인이나 문학과 예술을 중시한다. 반면에 아르카디와 바자로프로 대변되는 아들 세대는 그 모든 걸 부정한다. 아버지 세대의 예술적인 교양(이자 허세)과 거기에서 오는 자기만족(이자 교만)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 예술적 교양과 만족이, 수많은 농노들과 하인들을 깔고 있는 계급적 지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저항으로 아들 세대는 스스로를 유물론자이자 경험론자로 설정하고, 모든 예술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아들 세대에게는 [자유주의 = 낭만주의 = 예술 = 실없는 소리 = 쓰레기]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훌륭한 화학자는 그 어떤 시인보다 스무 배는 더 유익합니다” 
“그럼 당신은 예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이 갈등에서 작가 투르게네프는 그 누구도 편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두 세대 모두 날카롭게 진단할 뿐이다. 아버지 세대는 전형적인 꼰대로, 귀족적인 자기만족에 빠져있으며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를 지키고자 하는 무능력한 어른이다. 그렇다고 아들 세대를 긍정적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아들 세대의 인물들은 스스로 강력하게 ‘진보’를 표방하고 그 자부심에 빠져 살지만, 그들의 논리와 삶은 역시도 자기만족적인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이토록 선명한 이분법을 만들면서도, 결국 작가가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어느 한쪽의 옳고 그름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부터의 판단은 결국 독자의 몫일 텐데, 2019년 한국에서 살고 있는 ‘아들’인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치적으로 보수였던 도스토옙스키와는 다르게) 스스로 진보를 표방했던 투르게네프의 꼰대 희화화가 방점일까. 혹은 세대적으로 나뉘어버린 당시 러시아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전부였을까.   

       


1. 어머니들과 딸들은 어디로 갔을까. 아들들의 ‘오만함’과 ‘조롱’


나는 작가가 택한 이 교묘한 ‘중립’에서, 오히려 꼰대가 되어버린 아버지 세대에 대한 비난과 우려보다는 아들 세대 (혹은 지금의 나)에 대한 불편하고도 정확한 진단을 감지했다. 투르게네프가 젊은이를 묘사한 코드는 ‘조롱’과 ‘오만함’이다. 소설 속 ‘아들들’은,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조롱과 기존의 질서는 모조리 틀렸다는 오만함으로 무장했다.


그런데 그 오만함은, 그들이 가진 ‘젊음’이라는 특권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다. ‘젊음’은 꼰대를 조롱하고 오만할 수 있는 필요조건일 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소설 속 젊은 세대가 오만함과 조롱으로 무장할 수 있는 본질적인 이유(충분조건)는, ‘주류 남성’이라는 지위다. 소설 속 초점이 맞춰지는 ‘젊은이’가 모두 당대의 엘리트 남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아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오만할 수 있고, 쉽게 남을 조롱할 수 있다.

  

“처음에는 거의 사탄과 같은 오만함, 다음에는 조롱. 바로 이런 것에 젊은이들이 매혹되고 있고, 이런 것에 젊은이들의 미숙한 마음이 정복되고 있어!”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 진보적이라고 스스로를 굳게 믿고 있는 소설 속의 젊은이들은, 실은 아버지를 등에 업은 채 아버지의 지위로 계급적인 특권을 누리는 ‘아들’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 아르카디는 마을의 어린 여성을 집에 데려와서 사는 아버지의 결정을 ‘선택’이라며 편들어주지만, 그게 여성에게도 주체적인 ‘선택’이었을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아들의 '진보적인' 시선은 ‘하층민 젊은 여성’을 배제하고 ‘지주 아버지’의 입장만 포착할 뿐이다.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속에서는, 수많은 어머니들과 딸들이 사라져 있다.


“우리들처럼 진지한 남자들이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여자들은 우리의 대화를 이해할 필요가 전혀 없지”


2. ‘세대 갈등’ 뒤에 감춰진 것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은, 세대 갈등이라는 표면적인 주제 뒤에 많은 걸 감추어 놓았다. 트루게네프는 진보(아들)와 보수(아버지)의 세대 갈등을 날카롭게 그려내는 듯하지만, 그의 시선이 포착한 ‘진보’가 매우 좁은 세계의 기만적인 논리일 뿐임을 자백할 뿐이다.


그리고 그 자백으로 드러나는 ‘아들들’의 민낯은,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와 연결된다. 정치적인 차이와 세대 차이가 오래전부터 겹쳐진 채로 양극화된 한국 사회에선, (소설처럼) ‘꼰대’를 지적하며 ‘젊음’을 누리는 게 너무나 쉽다. 소설 속 아들들이 아버지들의 모든 얘기를 조롱하고 거부만 하면 쉽게 ‘니힐리스트’와 ‘혁명적인 세대’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태극기 부대를 조롱하고 박근혜를 욕하는 것으로 쉽게 ‘진보’가 된다. 어쩌면 그럴 필요까지도 없다. 이미 정치적인 이분법으로 갈려져 있는 모든 영역에서,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편인 척 만하면 ‘의식 있는 젊은이’로 쉽게 편입된다. 그리고 이 선택은 거의 암묵적인 강요에 가깝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 ‘요새 것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로 시작하는 ‘탈정치화된 소시민’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보수적인 입장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 ‘젊은 꼰대’나 ‘일베’라는 강력한 낙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극단적으로 나뉜 두 개의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강박적으로 의식 있는 진보적 젊은이처럼 보이기 위해 늘 꼰대를 조롱하고, ‘청년’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들어보게. 가령 계몽이 유익하다고 말하면 진부하지만, 계몽이 유해하다고 말하면 역겨울 정도로 진부하게 돼. 얼핏 보면 이게 더 멋있어 보이지. 그러나 사실은 똑같은 거야.”


3. 세대 갈등. 허구적인 이분법.


촛불집회, 태극기 집회, 탄핵, 선거를 거치면서 가장 많이 들린 말도 ‘세대 갈등’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세대 갈등이라는 프레임 역시도 많은 걸 감춘다. 지금 시점에 돌이켜 본 ‘세대 갈등’이라는 강력한 단어는, 많은 맥락과 다양성을 눙치는 매우 허구적이고 정치적인 캐치프레이즈다.


갈등은 결코 단순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성, 계급, 인종, 지역 등등 많은 층위가 겹겹이 쌓여서 차이와 갈등을 만든다. 그럼에도 그 차이들과 갈등들은, 세대 갈등이라는 허구적인 이분법으로 쉽게 갈무리된다. 마치 아빠의 세대만 빨리 물러나면 아들인 내 일자리가 생길 것처럼, 혹은 정권만 바뀌면 모든 정의가 구현될 것처럼.


이제는 이 진부하고 기만적인 감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꿔 말하면, 기존의 정치적 이분법에 스스로 동원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속에서 없어진 ‘어머니와 딸들’을 찾아야 하고, ‘꼰대’를 조롱하고 그들과 나를 단편적으로 구분하려는 기만에서 스스로에서 탈출해야 한다.


트루게네프는 <아버지와 아들>을 세대 갈등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중립적인 텍스트로 남기고 싶어 했지만, 결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사라진 어머니와 딸들을 찾으라는 경고이자 충고 정도로 밖에 지금의 ‘아들들’에게 닿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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