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영화 <스윙키즈>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발제/녹취가 업로드됩니다.
*5월의 주제는 [몸]입니다.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51년 한국전쟁, 최대 규모의 거제 포로수용소에 새로 부임해 온 소장은 수용소의 대외적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전쟁 포로들로 댄스단을 결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미군 하사이자 전직 브로드웨이 탭댄서 잭슨을 필두로 북한군 포로 로기수, 4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양공주 양판래, 피난 가다 잡혀 온 강병삼, 중국군 포로 샤오팡이 함께 '스윙키즈'라는 이름의 댄스단을 조직한다. 아니, 윗분들과 자신의 이해관계 안에 기꺼이 조직'된다'.
잭슨은 스윙키즈의 공연을 성공시켜 일본에 두고 온 자신의 가족에게 돌아갈 생각이다. 양판래는 가족을 먹여살릴 돈이 필요하고, 강병삼은 피난 중에 헤어진 아내를 찾기 위해 유명해져야 하며, 샤오팡은 숨은 자신의 춤 실력을 깨우고 싶다. 유일하게 이해관계 안에 없고 오히려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사람이 로기수다. 로기수는 북한군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웅인 형을 둔 공산군이다. 그에게 탭댄스는 그냥 춤이 아니라 '미국' 춤이다. 주적의 춤이기에 추어선 안 되는 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기수는 멈출 수 없다. 한번 탭댄스를 본 후에는 모든 소리를 탭으로 들리고,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발재간을 놀린다.
처음 '몸'이라는 주제를 받았을 때에 무슨 영화를 고를까 고민이 많았다. 가장 먼저 역시 여성의 몸을 이야기할까 싶었지만 그보다도 더 근원적인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닿은 것이 춤. 너무 여기저기 자주 말하고 다녀서 모두 알 듯, 요즘 춤에 빠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춤으로 표현되는 몸의 '흥'(또는 바이브?)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내적 댄스'라는 말이 통용되듯이.
크리스마스 철이 되면 온갖 데에서 퍼져 나오는 캐롤(Carol)도 원래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행위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캐롤이라는 단어는 옛 프랑스어 카롤르(carole)에서 유래했는데, 카롤르는 중간 중간 발을 구르며 원 모양으로 추던 춤을 의미한다. 조반니 보카치오도 『데카메론』에서 캐롤을 부른다고 하지 않고 캐롤을 춘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엄숙하기로 유명한 중세에도 영국의 한 사제가 교회 앞에서 캐롤을 추고 부르는 신도들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 때에는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축복일마다 캐롤을 추었다고 하니, 성직자가 아니었으면 참지 못했을 것도 같다.) 동양 어느 나라에서 마당을 밟으며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 서양 어느 나라에서는 캐롤을 추고 불렀다고 하니 고성방가, 아니 춤은 인간의 본능인 셈이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그런데일까. 언제부턴가 춤이 원시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정해진 자리, 이를 테면 무대나 무도회장과 같은 공간에서만 출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캐롤은 15세기 즈음 춤과 노래가 떨어진 형태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15세기 유럽은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르네상스로 넘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시기다. 문득 푸코가 떠오른다. 푸코는 권력은 몸의 대상화를 지향한다는 전제를 강조한다. 권력은 가장 먼저 몸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몸이야말로 권력이 조장해나가는 어떤 이념적 가치에도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함과 실존성의 지표이기에 권력의 감시와 통제는 인간의 몸을 훈육하려는 집요한 시도와 결합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373쪽). 쉽게 말해, 몸은 가장 먼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그 자체로 실존이기 때문이다. 증명할 수 없는 영혼이나 정신과 달리 몸은 그 자체로 존재의 증표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도 몸의 자율성이 회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학교와 회사는 우리 몸과 시간을 통제한다. 때와 장소에 따른 예의라는 이름으로 통제되는 것도 우리의 몸이다. 1985년에 만들어진 영화 <백야>에서부터 2018년에 만들어진 영화 <스윙키즈>까지, 많은 영화가 자유를 부르짖는 수단으로 춤을 선택한 이유도 어떠한 이념에도 환원될 수 없다는 몸의 속성 때문일 테다. <백야>의 배경은 냉전 시대로, 주인공인 러시아 출신 발레리나는 금지된 춤을 추고 싶어 미국으로 망명한다. 하지만 비행기 사고로 러시아에 추락하게 된다. 러시아 정권의 감시 아래 자유를 갈망하며 몰래 금지된 춤을 춘다. <스윙키즈>의 로기수처럼.
그래서일까. 로기수는 춤추는 순간에도 몇 번 웃지 않는다. 로기수를 비롯한 스윙키즈 모두 춤을 출 때 사뭇 진지하고 또 얼어붙은 표정이다. 코미디에서 드라마로 넘어가는 다소 조잡해보이는 연출 속에서도 로기수는 내내 비장하다. "그(탭) 소리만 들으면 밤낮으로 심장이 끓어 번지는 거이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나” 탭 비슷한 소리에도 홱홱 돌아버리던 로기수는 결국 이념 때문에 외면했던 탭댄서이자 미군 하사에게 고백한다. “탭댄스라는거이 참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드만.” 로기수의 순수한 고백에 관객은 기쁘기보다는 슬퍼진다. 해피엔딩을 바라면서도 비극적인 엔딩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로기수의 순수한 열정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이념적 갈등 아래에 저항의 몸짓이 된다.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여도 주어진 여건을 극복할 수 없을 때 발하는 비장미가 된다.
그럼에도 로기수가 춤을 추는 이유를 양판래의 말에서 추측해본다. 춤을 추면서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말. 전쟁 상황도, 자신만을 바라보는 동생들도 모두 잊고 나 자신으로 살 수 있다는 말. 나 또한 6개월 넘게 춤을 추며 느낀다. 아마도 사람들이 요가와 같은 운동을 하며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리라. 내 다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구나, 내 등이 펴지고 있구나, 등등 내가 몸을 움직이면서 어떤 감각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림으로써 비로소 내가 그냥 존재하고 있는 기분. 많은 사람들이 '나'를 취향, 신념 등으로 설명하곤 하지만, 정혜신 교수는 『당신이 옳다』에서 '나'란 감정과 감각이라고 말한다. 역할과 의무와 같은 껍데기에서 떨어진, 현재 존재함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정에 비해 감각이 보다 빠르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몸은 내가 나를 느끼는 가장 빠른 길이 된다.
로기수는 죽은 이후 영화 막바지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활짝 웃고 춤을 춘다. 바로 잭슨 하사의 춤과 로기수의 춤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로기수는 춤에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서 춤으로 자신을 맘껏 표현하며 그리고 살아있음을 느끼며 북한군도 영웅의 동생도 포로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살기를 꿈꾸었지만 결국 그 꿈은 몸에서 해방된 죽음 이후에야 이루어진다. 누구나 사회에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그저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주 춤을 추며 허튼 수작을 부린다. 보다 자주 그냥 ‘나’로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해. 둠칙둠칫 흐느적 흐느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