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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ul 13. 2019

탈주 -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길 바라는 사회로부터

57. 영화 <델마와 루이스>

*한 달에 한 주제를 정해서 책 2권과 영화 2편을 봅니다.

*매주 한 명의 에디터가 쓴 리뷰와, 여러 에디터가 함께 나눈 대화가 각각 업로드됩니다.

*7월의 주제는 [여행]입니다.


*7월 주제 [여행] 일정표

1. 영화 〈델마와 루이스〉(1993), 리들리 스콧

2. 책 『대도시의 사랑법』(2019), 박상영

3. 영화 〈안경〉(2007), 오기가미 나오코

2. 책 - 미정... 힝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0.

절친한 친구 사이인 평범한 주부 델마(지나 데이비스)와 독신의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서랜든)는 수동적이고 권태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짧은 주말여행을 계획한다. 단순히 주말여행일 뿐이지만, 델마에게는 쉽게 떠나기 어려운 거대한 일탈이다. “조용히 좀 하라”고 말하며 늘 침묵을 강요하는 남편 앞에선 그 어떤 얘기도 쉽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델마는 남편의 허락 없이 루이스의 차에 타고, 그녀들은 가정과 일터를 뒤로하고 여행길을 떠난다. 그녀들이 입은 멋스러운 옷과 아름다운 클래식 카는 영상을 한껏 화려하게 만들고, 영화는 이렇게 낭만적인 ‘로드무비’를 예고하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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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낭만적인 여행길에 ‘남성’들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로드 무비’일 줄 알았던 영화는 단숨에 ‘탈주 영화’가 된다. 이때부터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길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하는 폭력적인 경험의 압축판으로 제시된다. 그들이 탈주하며 마주치는 사회 구석구석의 여러 모순들은 영화 밖의 현실과 오버랩되고, ‘떠나야만 했던’ 공간은 더 이상 억압된 가정이나 권태로운 일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지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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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가 여행길[삶]을 통과하며 마주하는 남성[현실]은 여러 가지 층위로 나뉠 수 있는데, 이 남성[현실]들의 몽타주를 총체적인 모습으로 엮어보면 (영화가 개봉한 지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의 사회와도 무섭게 닮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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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델마와 루이스의 여행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남자는, 휴게소의 술집에서 만난 건달(이자 성폭행범)이다. 잠시 쉬기 위해서 들어온  델마와 루이스에게 접근한 건달은 노골적인 구애 끝에 델마와 춤을 추게 되고, 이윽고 술에 취한 델마를 주차장에 끌고 가 성폭행하려 한다. 결국 총을 들고 따라 나온 루이스가 델마를 구해주는데, 남자는 아쉽다는 듯 성폭행을 멈출 뿐, 자신을 겨눈 총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여성이 겨누는 총은 늘 여성들의 ‘방어수단’으로만 활용되었을 뿐, 한 번도 직접적인 위협이나 ‘공격’의 수단이 된 적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성들의 그 어떤 거부나 경고의 제스처도 약자의 몸부림일 뿐, 남성에겐 결코 실제적인 위협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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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는 남성들이 가진 이 기득권, 말하자면 무서움 따위는 ‘몰라도 되는 권력’를 박살 낸다. 총을 든 루이스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또 한 번 성적으로 조롱하는 남자를 향해 루이스는 총을 쏜다. 늘 ‘방어’의 제스처로만 여겨졌던 여성들의 폭력에 대한 ‘거부’를 매우 선명한 ‘경고’이자 (남성들의 폭력과 동일한 수준의) ‘위협’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사회에선 결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남성들의 만연한 폭력을, 영화 서사로나마 처벌을 하고 마땅한 제동을 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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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남성들이 가진 불평등한 권력을 박살내고 그의 범죄 행위에 마땅한 처벌을 내리자, 그 이후로 델마와 루이스는 ‘범죄자’로 신분이 바뀐다. ‘정당방위’라거나 ‘자신을 지킬 권리’ 따위는 그녀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옵션이다. 델마가 남자와 춤을 추었다는 알리바이가 있기 때문이다. 고작 “같이 술을 먹고 춤을 췄다는” 이유 하나로, 남자는 델마를 강간해도 되는 권리를 사회로부터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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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 역시도 현실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대목이다. 술에 취한 여자를 성적으로 착취한 뒤, ‘합의된 관계’라는 변명이 당연한 듯 나오고, 오히려 피해자가 된 여성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모습은 지금의 현실과 무척 닮아 있다. 델마와 루이스가 범죄자로 분류되는 서사도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이미 남성들끼리 공모하여 만들어진 사회에서는, 그 세계의 룰을 깨는 여성을 결코 가만두지 않고 수많은 딱지들을 붙여가며 결코 그들의 세계에 쉽게 넣어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세계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아차리게 되면, 이때부턴 사회 구석구석 숨어있는 많은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눈에 띄며 위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3.

그래서 델마와 루이스에게는 범죄자라는 딱지와 함께 사회의 많은 억압과 감시가 따라붙게 되고, 동시에 이들의 ‘탈주’ 과정에서는 일상에 만연했던 폭력들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단순한 조회로 이들이 범죄자임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남성으로 밖에 재현되지 않는)경찰들을 늘 피해 다녀야 하고, 만날 때마다 성적으로 조롱하는 트럭 기사를 매번 지나친다. 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은 (하룻밤의 성적 착취와 더불어서) 전재산을 훔쳐 간 사기꾼 제이드(브래드 피트)를 만나기도 한다. 이렇게 누적되는 장면들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평가받고 등급이 매겨지며, 성적으로 대상화되어 착취당하는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현실이랑 또다시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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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남성들의 공모와 억압을, 델마와 루이스는 모조리 박살 낸다. 자신을 범죄자로 낙인찍을 경찰을 트렁크에 가두고, 그들을 매번 성적으로 조롱했던 트럭 기사의 트럭을 불태운다. 그들이 제이드에게 도둑맞은 돈은, (남성 점원을 대상으로 한) 강도질로 되찾는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결국 델마와 루이스를 점점 더 사회와 멀어지는 범죄자로 만드는데, 오히려 그럴수록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며 그녀들의 ‘탈주’를 매우 정당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범죄를 다룬 영화와 구분된다. 그래서 영화가 진행될수록 델마와 루이스는 스스로 '깨어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고, 그들을 범죄자로 몰아간 사회가 가진 모순 폭력성은 점점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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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상의 노골적인 폭력들을 모두 통과한 뒤, 델마와 루이스가 마주하는 가장 마지막 남성이 (영화 마지막 씬에 마침내 대면하게 되는) 슬로컴브 형사(하비 케이틀)다. 이 형사는 얼핏 보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델마와 루이스를 이해하는 남성처럼 보인다. 델마의 남편, 술집의 건달, 트럭 기사, 제이디 등 이 영화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남성들이 여성을 착취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 반해, 이 형사만큼은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 델마와 루이스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형사야말로, 이 영화를 진정한 ‘탈주’의 서사로 의미화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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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둘러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가부장제를 포기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면서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남성들이 많아졌다.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을 하나의 세련된 스타일로 여기면서 불평등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제법 그럴싸한 논리와 실천들도 덩달아 많아진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런 ‘오빠들’은 실제 가부장제라는 큰 틀을 벗어날 의지는 전혀 없는 채로, 그 속에서 기득권을 쥔 채 여성을 지지하며 온갖 생색을 내는 것에 불과하다. “페미니즘은 지지하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건 여성주의가 아니라 평등주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따위의 말들이 그렇게 생겨났다. 이른바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은 이렇게 그럴싸한 관용을 보임으로써 페미니즘이 가져야 할 문제의식과 날카로움을 눙친다. 매우 교묘한 억압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오빠’들은 꽤나 설득력 있어 보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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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면, 슬로컴브 형사의 모습이 정확히 이 ‘오빠’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 그는 영화 속에서 남성들의 공모로 지탱되는 남성 중심 사회의 안전장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델마와 루이스를 범죄자로 몰어간 남성들을 잡아서 추궁하고, 델마와 루이스에게 다시 사회로 복귀할 기회를 주고자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 사회가 이미 불평등이 만연한 ‘모순된 사회’라는 점은 살며시 은폐한다. 그래서 그의 모든 실천은 결국 델마와 루이스를 다시 ‘모순된 사회’ 속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기능할 뿐이지, 실제 그 ‘모순된 사회’를 하나씩 박살 내는 실천을 하고 있는 델마와 루이스를 지지하는 데는 조금도 보탬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현실 속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이 그럴듯하게 들리듯이, ‘형사’의 모습으로 ‘정의’를 외치고 있는 슬로컴브의 역할도 그럴싸한 관용으로 보인다.



5.

델마와 루이스는 슬로컴브 형사의 품으로도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이들을 다시 남성 세계로 유혹하려는 교묘한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다. “(강간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텍사스를 안 거치고는 (자유의 공간으로 묘사되는) 멕시코로 갈 수 없”듯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이미 남성 중심이 된 사회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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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델마와 루이스는 형사의 손짓을 뒤로하고 그랜드 캐니언의 절벽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로드무비’를 예고하며 시작했던 영화는, ‘탈주’를 보여주면서 끝나게 된다. 끔찍한 사회를 벗어나는 완벽한 ‘탈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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