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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슨한 빌리지 Jan 22. 2018

7-1. <시대의 소음> 뒷담화

*<느빌>의 오프라인 모임을 기록합니다. 느빌 사람들의 열띤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하겠습니다.

*발제문과 녹취록은 전담 에디터 없이 돌아가며 작성합니다.

*이번 모임엔 학곰, 박루저, 다희, 동석, 이주, 해정 님이 참여했습니다.

*본 녹취록은 이전 게시글인 '발제문'을 읽고 오시면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링크 : <시대의 소음> 발제문

https://brunch.co.kr/@neuvilbooks/42

     






     



발제문 이야기



이주 – 소설을 두 번 읽었어요. 두 번째 읽으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그렇지만 여전히 아직,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 자세히 모르다 보니 세 번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걸 소화하기엔 배경지식이 모자라 소화하기가 힘들었고, 번역 역시 읽기에 수월하지 않았어요.

     

박루저 – 저 역시 온전히 즐길 수가 없었어요. 명작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소설에 바로 접속하기 힘든 느낌이 오랜만이었습니다. 웬만하면 재미없으면서 명작이라는 생각은 안하는데, 읽는 내내 엄청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석 – 박루저가 이런 말 하는 건 처음 듣는 것 같습니다.

     

박루저 – 그만큼 진짜 재미있게 봤어요. 개인적으로 욕심도 났고요. 여유 있게 두세 달 기간을 잡고서, 다른 소설들과 함께 엮으면 좋은 발제를 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발제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건, 발제가 어려울 소설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책의 구성이나 내용을 되짚기보다는 발제자가 생각하는 주제를 잡고서 썼으면 좋지 않을까 싶었어요. 적당한 분석을 넘어서 주제 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의 정치성, 아이러니나 형식주의. 예술가와 예술 사이의 관계 등 캐치할 주제가 많기도 했으니까요. <첫숨> 때도 그랬지만 이런 소설은 독자가 읽을 때 어려운 부분이 많을 테니까, 그것을 발제자가 긁어주었으면 해요. 설령 일방적이더라도 발제자가 자기만의 명료한 주제의식으로 내용을 정리하면 속시원한 발제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학곰 – 저는 발제의 마지막 문장 때문에 발제가 좋았어요.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걸 포인트로 삼아 발제자의 코멘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쇼스타코비치가 예술을 하면서, 본인이 그걸 의도하지 않더라도 스탈린 체제에서 선동용으로 사용되었고, 그렇게 이용당했잖아요.

 책 내용 중에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 라는 대목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들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은, 체제를 떠나서, 같은 텍스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데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 포인트가 되면 그런 부분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책은 처음엔 재미없었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 부터 재미있었어요. 막판에 초반에 던진 것들을 회수하는 것이 정말 좋았구요. 아쉽기도 했던 건, 독재의 앞잡이처럼 인식된 인물을 ‘사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라고 얘기하는 느낌이었는데, 그걸 회수하는 부분이 지루했어요. 읽는 나는 이미 알고 있는데 책이 뒤늦게 설명하는 느낌이었어요.

     

동석 – 책에 집중이 안 됐었는데 발제문을 보고 정리가 되어서 좋았어요.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니만큼 음악에 포커스를 맞추면 어떨까 싶었구요. 궁금했던 건, 이 책에서 어쨌든 실존인물을 가지고 가상의... 물론 완전 가상은 아니겠지만, 앞잡이로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던 게 사실인 건지..

     

박루저 – 하나의 견해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주 – 제가 알고 있기로는 동시대에는 앞잡이로 이해됐지만, 그 이후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었던 것으로 알아요. 그 사람이 만든 음악 중에 체제에 반하거나, 형식주의를 시도하려 했던 부분이라든지, 이 사람이 완전 소비에트의 앞잡이는 아니었을 것이다...라는 분석인 거죠.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평가이니만큼 이 사람이 실제로 그러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을 것 같아요.

     

학곰 – 결국 작가에 의해 재구성된 세계인 셈이죠. 다른 맥락이지만, 재평가 되는 인물들이 있잖아요. 우리나라도.

     

박루저 - 광해!

     

학곰 – 광해는 잘 모르겠고... 친일파 경우도 그렇고. 박정희도 그렇고.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게 과거의 인물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건 외국인(영국인 작가)이 외국인(소련 음악가)을 바라본 시선이잖아요. 소설 내부 설정에 대해 팩트 체크를 하는 건, 우리가 따로 공부를 해야 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다희 – 그래도 결국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니까 발제문에 그 부분에 대한 정리가 있으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었어요. 개인적으로 책 뒷부분을 못 읽어서... (민망한 웃음)

     

박루저 – 여기서 잠깐 스탑 합시다.

     

동석 - (엄한 목소리) 잠깐!

     

학곰 – 압박이 심했을 거예요. 다 읽지를 못했는데 모임엔 동석 씨가 분명 참여를 할 테니까….

     

다희 - (웃음) 읽기 어려웠던 이유가 만연체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3인칭 관찰자 시점인 듯한데, 어디에 이입을 해서 읽어야 할지 몰라 읽기가 어려웠어요. 이런 소설은, 우리가 알아왔던 거대 역사와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의 역사 사이에 쇼스타코비치라는 인물이 단지 예술을 좋아해서 예술을 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예술의 위상을 풀어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시스템과 그 시스템에 반대하는 헤게모니 싸움 한 가운데 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어요.

     

이주 – 지금까지 해온 발제들과 이어지는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시스템과 개인.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


     

학곰 – 저는 이 부분에 대해 많이 얘기했으면 좋겠어요. “듣는 귀가 있는 자 들어라.” 이 파트가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이주 – 저도 기억에 남는 독백이 있어요. ‘예술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건 인민을 위해서도 아니고 정치가를 위해서도 아니고, 그저 내 음악을 들어줄 이를 위해 썼다는 부분이었는데, 인상 깊었어요. 정치가이든 인민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 라는 그 서술이. 진짜 예술… 잘은 모르겠지만, 그리고 개인 개인마다 성공 등 다른 이유로 예술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부분에서 과연 예술가는 어떤 자세로 창작을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박루저 – 오스카 와일드 생각이 많이 났어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서문을 보면 ‘나는 예술적이고 아름다움을 위해 쓰는 거지, 세속적 가치나 일상이랑 묶이는 건 거부한다.’ 식의 태도가 있거든요. 그건 장르로서의 ‘예술을 위한 예술’ 뿐만 아니라 ‘일상 태도로서 예술은 그저 예술’이라는 태도인데, 이를테면 예술에 대한 어떤 평가도 거부하는 태도 같은 거예요. 그런데 순수 예술은 예술가가 아무리 유미주의적인 태도로 임한다 해도, 언론을 통과되어 대중에게 닿을 때 발생되는 그 정치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 책에서도 그런 부분이 있잖아요. 같은 뮤지컬인데도 언론에서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 대중예술의 경우 대중에게 직접 닿는 반면 순수예술은 비평가나 언론에 의해 평가가 좌지우지되기에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 같아요. 현대 미술의 경우, 미국 정부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 예술가를 키우기도 한다잖아요. 순수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몇 명의 사상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모습을 잘 그려낸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동석 –소설의 배경도 소련이잖아요. 소련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였으니 가장 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사상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김씨일가를 추종하고 찬양하는 노래가 생산되는 것을 보면 예술이 상위의 사람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어요. 

     

이주 – 저는 그 부분이 진짜 재미있었어요. 미국사람들이 쇼스타코비치를 회유하려 할 때, 사실 그 사람들도 스스로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를 정치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는 게 흥미로웠어요.

     

동석  쇼스타코비치도 스탈린 하에 있었기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시 그는 유명한 음악가니까 미국의 정치선전에도 적합한 인물이었던 거죠. 몇 십 명의 시민을 자본주의로 포섭하는 것 보다는 한 명의 거물을 끌어들니는게 메스컴에서도 훨씬 선전효과가 클테니까요. 단순히 서로의 사상이 더 좋다라는 걸 떠나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요.


학곰 – 미국 사람들은 ‘창문으로 뛰어내려라’ 라는 말을 계속 해요. 불명예스럽게 예술 할바에 아예 자살해라. 라고요. 이 말이 어떤 의도에서 나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렇게 말하는 미국인들의 모습에서 ‘말이야 쉽지.’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본주의 가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탈린 체제나 사회주의에 대해 아예 모르는 거죠.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전혀 상상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어요. 쇼스타코비치의 입장에서 보면, 실은 여태 부정을 당한 거잖아요. 자신이 쓴 오페라가 금지를 당하면서부터 계속해서 부정을 당한 셈인데, 그 이후로는 체제 맞춤형으로는 쓰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기검열을 했을 거라 생각해요. 들을 수 있는 수준이 있는 사람만 들어라, 라는 자위를 하며 쓰는 체념 단계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만약 스탈린 체제에 본인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면 지금 같은 갈등은 없었을 거예요. 그가 미국에 흔들린 것은 체제를 다 떠나서 본인의 예술이 가장 큰 이유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박루저 – 미국인이 피카소를 언급하잖아요. 스페인 내전에 반대하는 양심적인 그림을 그리지만, 어쨌든 자유주의 안에서 엘리트가 되어서, 그 모든 가호를 다 누리면서 특정 시스템을 욕한다는 건 참 쉽다고. 자본주의 안에서는 사회주의적 색채를 약간만 띠더라도 매우 진보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것처럼요. 그런데 그 쉬운 비판 때문에, 사회주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처럼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삭제가 돼요.

     

이주 – 우리는 그 시대를 살지 못한 외부인이 때문에, 그 사람들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거나 평가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아요. 쇼스타코비치의 입장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요. 스스로의 입장을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이해해주지 않는 느낌 같은...

     

학곰 – 스탈린 체제였으니까, 말 그대로 대다수가 기획된 메시지일 텐데, ‘들을 수 있는 사람만 들어라.’하며 숨은 메시지를 더하고 은유를 막 덧칠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회적 검열이 심할 때, 은유와 비유가 더 생기는 게 아닐까 싶네요.






시스템과 개인, 그리고 스탠스


     

다희 – 이 사람의 독백 중에 “넓은 세상이 통제 불가능하게 된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만이라도 확실히 통제해야 한다. 그 영역이 아무리 작을지라도”라고 말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우리가 쭉 읽어온 텍스트들이 궁극적으로 하는 얘기가 그런 게 아닌가 싶었고요. 체제와 시스템을 거부하고 바꾸는 것 자체가 어려운 환경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되게 사소한 일일 수 있다는 거죠. 그 사소한 행보들이 결국 중요하다는 맥락이 쭉 이어지는 듯 해요.

 

어제 인류학을 전공한 친구와 인터뷰를 했는데요. 인류학에는 민족지라고 해서 개인 세계사를 다룬대요.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처럼 한 개인의 구술사를 풀어내는 거죠. 어느 인류학자가 충남의 어느 빨갱이 마을이라 불려왔던 마을의 조사를 했는데, 거기는 체제를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대요. 결국 가족의 생존과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체제를 왔다갔다 하다가, 마지막에 그쪽을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는 이유로 80년대 말까지 빨갱이 마을이라 불렸대요.


그 인류학자는 한국 전쟁에 대한 주류 역사가 대다수이고 그것에 대항하는 저항의 역사가 있지만, 자신은 그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 당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제 3의 역사를 남겨놓고 싶었다고 해요. 존재 자체를 증명해내고 싶었다고요. 이런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으니까요.

     

학곰 – 대학 강의 중에 5.18과 관련된 내용을 다뤘었는데, 그때 그걸 주제로 한 영화가 96년에 처음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김영삼 정권 때가 처음이었다는 것이죠. 그 이후로 나온 5.18 영화들을 쭉 보면서 당시 제가 내린 결론은, 복원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결국 ‘그 시간에, 그 곳에, 그 사람이 있었다.’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라는 것이었어요. 쇼스타코비치는 유명인이고 위키에라도 적힐 인물인데 (웃음)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의 이야기는 삭제되기 마련이잖아요. 복원되는 과정에 있어 그런 영화들이 비추는 개인의 서사가, 복원하는 작업의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박루저 – 한편으로는 ‘제 3의 길’이라고 하지만, 이것 역시 정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들 스스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복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결국 누군가가 그들을 복원하겠다는 의식 속에서 ‘그들’을 찾는 과정인 거죠. 이런 복원 작업에 아무런 정치적 목적의식이 부재할 순 없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역사적 하위 주체를 호명한다고 해도, 결국 그 호명을 행하는 사람은 이미 주류에 속해있는 권위자에요. 권위자의 호명이 아니고선 누구도 호명되지 않는 이 구조 자체는 극복될 수 없는 듯합니다.  

     

학곰 – 이를테면, 기득권인 사람이 그것들을 누리면서 노동운동을 얘기하는 것 같은 걸까요.

     

다희 – 하지만 그래서 더 유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자신이 속한 곳을 벗어나 무언가를 서술한다는 거잖아요.

     

학곰 – 그런데 가끔은 괴리감을 느낄 때가 있어요. 돌아갈 곳이 있는 자와 돌아갈 곳이 없는 자의 차이 같다고나 할까요.

     

박루저 – 그러니까 이런 거죠. 누군가가 노동운동에 대해 진보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그 의식은 그 세계를 직접 겪으며 얻게 된 감각이라기보다 결국 권위자들의 말과 글을 통해 가지게 된 것이 크지 않을까…. 그 점에서 조금 씁쓸하기도 해요.

     

이주 – 더 힘든 현실에 가까운 사람들은 실제 그런 노동 운동을 할 여유조차도 없는 게 사실이잖아요.

     

박루저 – 그렇죠. 그리고 어느 신문사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르포를 쓰겠다고 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노동운동의 가치나 절실함 자체를 감정이입해서 공감한 게 아니라, 그 과정을 단지 르포적으로만 쓰는 거예요. 저는 그래도 그런 수업엔 운동 현장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현장에서 이뤄지는 운동의 본질보다는 단지 ‘르포 기자’로서 접근하며 거리를 두던 이들이 이명박과 박근혜를 까는 것만으로 ‘진보 의식’을 손쉽게 획득하는 모습이... 실제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의 삶과 밀착되어 고민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미니즘에도 이런 경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운동 방향에 실재적으로 공감하기보다, 그것을 악세사리로 사용하는 이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페미니즘 안에도 분명 여러 페미니즘이 있을 텐데, 자기 스탠스를 고민하고 드러낸다기보다는 너 페미니스트냐, 아니냐 혹은 지금 이 상황들 긍정하냐, 부정하냐라는 이분법으로 많은 논의가 수렴되는 양상은 안타까워요.

     

학곰 – 스탠스에 대해 얘기하자면, 저는 저와 제 주변의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했었는데요. 그런 식의 스탠스가 더욱 솔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으로 박루저님이 말한 '악세사리'에 부정적이에요. 그 이유는 동화된다는 것 때문이에요.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통해 결정하는 것이아니라, 필터링 없이 다른 사람들 하니까 나도 모르게 동화되는 것. 그걸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집단적 목소리보다 각자 개인이, 설령 아주 사적인 이유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삶을 기반으로 솔직한 스탠스를 취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해정 –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운동 내지는 사조를 악세사리로 취해본 사람과 취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어떤 운동을 악세사리로 취한다는 게 비단 기만이기만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악세사리’라는 명사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팔찌라든지 귀걸이라든지, 어떤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결국 내 삶의 반영이기도 하잖아요. 악세사리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내 스스로의 삶과 무관한 별개의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박루저 – 저 역시 그것이 별개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어떤 운동을 고민없이 악세사리로 취했을 때 다른 목소리들이 가려지는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근 유아인 사태처럼요. 찬반을 나누고, 유아인을 조롱하고, 이 현상에 다른 목소리를 내면 여혐을 보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논조로 나아가는 흐름이…. 그러면 결국 내가 수없이 저지른(그리고 아무리 조심해도 앞으로도 분명히 저지를)여혐은 돌아보지 않은 채, 그냥 말로만 거리를 두고 악세사리처럼 페미니즘 지지해버린다고 말하는 게 편한 게 되거든요. 그래서 이제는 조금 더 구체적인, 삶이랑 연결된 스탠스에 대한 고민을 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거죠.

예컨대 저도 지금의 현상들을 매우 반기지만,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개인이 장애인 비하발언을 서슴없이 한다면, 그런 형태의 페미니즘에는 동의할 수가 없거든요. 과연 다른 약자들에 대해 관심은 조금이라도 가졌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거죠. 다른 소수자들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가 그 부분에 대해서만 다른 이들에 대해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태도는 오히려 그들이 비판하는 '불평등’이나 '혐오'란 뭘까 싶은 거에요.


     

해정 – 하지만 다른 장애인, 노동자 문제에 대해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닐 거예요. 결국 사람마다 각자 개인의 문제를 절실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스스로에게 다급한 문제를 말하되, 조금 다른 결의 문제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낸다면 분명 베스트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문제에 대해 침묵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그 목소리를 악세사리나 기만으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박루저 - 음.. 단지 침묵하는 거를 기만이라는 게 아니라, 뭐랄까요 말하자면 제2 제3의 한서희가 계속해서 나온다면 페미니즘에 공감하고 연대할 사람이 결국 점점 적어지지 않을까 싶은 겁니다.


     

이주 – 얘기가 어느새 여기까지.. (웃음)

     

다희 – 모든 차별에 대해서 평등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맞지만, 세상의 모든 차별이나 억압에는 수준이나 위계가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장애인, 노동자의 절반도 결국 여성이잖아요. 이런 얘기가 나올 때면, 한 개인이 모든 논제들에 대해서 완벽하게 입장을 취할 수 있나하는 의문도 들어요. 또 그런 사람만 말할 수 있는 건가 싶고요. 누군가의 의견을 과연 악세사린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걸까 싶어요. 물론 박루저가 말한 르포 작가도 분명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사람도 자기 나름대로 '동일시보다는 객관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스탠스를 취한 것일 수 있잖아요. 사람마다 삶의 맥락이 다를 테니까요. 자기가 할 수 있는 말을 각자 하고, 그것을 억압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해요.

     

해정 – 악세사리 얘기가 나오면 결국 당사자성에 대해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당사자가 아니면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인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말은 비단 악세사리이고 기만이기만 한 걸까. 그런 시선이야 말로 다양한 스탠스의 여지를 차단하는 게 아닐까.

     

다희 – 결국 다양한 스탠스들이 토해지고, 그것들이 서로 부딪혀 갈등하며 나아가는 걸 거예요. 거대 이데올로기가 끝나고 굉장히 많은 미시적 담론이 이야기될 수 있는 시점이잖아요. 이때, 각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와 삶의 맥락이 있고, 다양한 이야기와 차별에 대한 운동들이 동시에 이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박루저 – 저는 그 다양한 스탠스가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일단 스탠스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구요.

     





급, 마무리



 이후 대략 30분 정도를 할애하여 페미니즘 얘기를 해버렸다. 발제와의 연관성이 안드로메다로 향하였기에 기록자의 자의적 판단으로 구체적 내용은 생략하였다.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뒷담화는 다시 <시대의 소음>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다음 발제자를 정하는 얘기로 넘어가버려 찝찝하게 마무리 되었는데..... 어쩌다 페미니즘으로 얘기가 나아갔지만, 결국 체제와 시스템 안에서 한 개인의 스탠스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얘기였던 것 같다. <시대의 소음>은 양 체제 사이, 쇼스타코비치 한 개인의 스탠스를 다룬 것일 테다. 뒷담화 자리를 마무리하며, 언젠가는 사회 내 한 개인의 스탠스에 대해 진득하게 얘기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 일곱 번째 뒷담화 끝!

으로 일곱 번째 뒷담화를 찝찝하게 마무리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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